[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12)

  • 입력 1996년 11월 12일 20시 11분


나에 대한 타당한 오해들〈19〉 애리에게 나와 현석의 관계를 말해주려고 했지만 나는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애리의 말문을 닫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밤이 깊어졌을 때까지도 애리의 파리 통신은 끝날 줄을 몰랐다. 『내가 살던 집은 굉장히 작은 스튜디오였어. 생 드니 바질리크에 있었는데 현관이나 부엌이 아예 없는 원룸이야. 그래도 목욕탕은 있었지. 마당도 있고. 그런데 그렇게 더러운 집은 처음 봤어. 아무리 남자들만 거쳐갔다고 해도 어쩜 그렇게까지 더러울까. 때가 많이 끼어서 벽이 두꺼워졌을 정도야』 얘기를 하고 있는 애리의 모습을 자세히 보니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특히 입술위의 인중이 뚜렷한 것이. 닮았다는 것은 씻어낼 수 없는 혈육의 징표이다. 『근데 또 집주인이 바캉스를 간 거야. 프랑스의 바캉스가 좀 길어? 내가 결국은 못 기다리고 집 전체에 비눗물을 끼얹고 몽땅 한 꺼풀 벗겨냈지. 나중에 주인이 왔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알아? 글쎄 내가 불어를 잘 못하는 걸 알고는 사월오일에 낸 집세 영수증을 삼월오일로 해서 써주려고 하는 거 있지. 외국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종종 사기를 당한대. 한국 친구가 계약서 쓸 때 도와주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당했을 거야. 참!』 애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똑바로 본다. 『언니 학교에 같이 있는 교수가 혹시 나 만났다는 말 안 해?』 문창과의 김교수가 와서 방학 때 파리에 갔다가 애리를 보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하자 애리는 깔깔댄다. 『어떻게 그렇게 만나냐? 언니하고 같은 학교에 있다는 말 듣고는 너무 반갑더라. 근데 그분 언니랑 친해? 말할 때도 괜히 불어를 섞어가면서 하고, 굉장히 멋있는 체 하던데』 『그럼 그 한국 친구라는 사람이 김선생 처남이었던 모양이구나?』 『응, 그 친구도 참 재미있게 만났어. 큰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는데 말야, 어떤 동양남자가 와서 「부 제트 코레안?」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엉겁결에 「맞아요!」라고 한국말로 대답하니까 그 사람도 한국말로 「맞아요?」하고 따라하잖아 서로 손까지 잡고 좋아했다니까』 <글 : 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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