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타당한 오해들〈20〉
애리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엌 쪽으로 간다.
『언니, 우리 커피 마시면서 얘기해. 내가 끓일게. 난 그런 거 좋아하거든』
커피메이커에 물을 부으면서도 입을 쉬지 않는다.
『언니는 요리에 관심없나봐. 냉장고에는 순 캔맥주뿐이고』
하더니 갑자기 내 쪽을 돌아보며
『아니야, 그게 아니고 언니는 먹는 데 관심이 없는 것 같아. 난 그런 사람 보면 못 참아. 나만 혼자 살찌기 억울하잖아』
라고도 한다. 나는 현석의 얘기를 꺼내야 하는 것이 점점 더 고통스럽다.
현석의 얘기를 해줄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애리는 내 생활을 꽤 바꿔 놓았다. 주로 불편한 쪽으로.
그녀는 요리를 좋아했지만 설거지를 싫어했다. 또 일을 벌이는 것 못지않게 중간에서 그만두는 것도 쉽게 했다. 텔레비전을 볼 때에도 거의 일분 간격으로 리모컨을 눌러댔고 무선전화기를 쓰고는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저녁내내 찾으러 다니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전화기는 내가 쓰는 안방이나 애리의 방으로 쓰고 있는 서재 같은 데가 아니라 대개 신문더미 위나 오디오장 안처럼 엉뚱한 데서 발견되곤 했다.
퇴근하고 돌아와 보면 애리는 싱크대 위에 온갖 조리기구를 늘어놓고 뭔가를 만들고 있긴 했다. 그러나 개수대 안에는 설거지할 그릇들이 수북이 쌓여 있고 거실에는 아직 물고기가 들어있지 않은 조그만 수족관과 걸지 않고 벽에 기대놓은 액자며 아이비 화분 따위가 잔뜩 늘어져 있었다. 결국 나는 혼자 저녁을 먹지 않는 대신 한 시간 정도는 애리가 늘어놓은 일의 뒤처리를 거들어야 했으며 두 시간 정도는 그녀의 변덕스러운 화제에 동참해야 했다.
이상한 것은 그런 일이 그다지 번거롭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질구레한 생활의 수고를 끝마친 뒤의 가벼운 보람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애리의 마구 어지럽혀진 방안의 이완이, 모든 것이 정확한 자리에 놓여 있는 내 방의 질서보다 오히려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
그날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언니, 애인 없어?』
애리가 무릎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밀감 껍질을 벗기며 불쑥 묻는다.<글:은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