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최규하씨의 「증언」

  • 입력 1996년 11월 13일 20시 43분


자의든 타의든 오늘 崔圭夏전대통령이 법정 증언대에 서게 되었다. 강제구인이냐 자진출두냐의 문제 못지않게 말문을 열 것인지 아닌지가 관심의 초점이다. 12.12와 5.18사건의 회오리속을 걸어온 崔씨는 사건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일 뿐만 아니라 어느 의미에서는 가련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崔씨가 취해온 진술거부의 일관된 입장은 그가 이들 사건의 피해자 중 한사람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정이 간다. 『재임 중 국정행위에 관해 증언을 하는 것은 국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그의 변명도 피해의 한(恨)을 자신의 가슴에 홀로 깊이 묻어버리고, 그래서 다시금 잊혀진 상실의 아픔을 남에게 전가하지 않겠다는 취지에서라면 인품의 일단을 보여주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崔씨는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서 이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짧은 기간에 한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시각이 이렇게 천양지판으로 달라진 예가 또 어디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더욱이 이 사건들의 진실은 아직 결말에 이른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차이도 여전하다. 사법을 통한 과거청산도 진실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면 진실의 규명은 단지 사건 당사자들이나 법원만의 임무가 아니다. 국민적 관심사요, 국민적 작업에 속한다. 사법의 절차상 진실규명은 항소심을 끝으로 확정되고 그 다음은 법리적인 논쟁만이 남는다. 진실이 어떠한가는 비단 이 사건의 피고인들과 변호인이나 검찰만이 아니라 이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모든 민주시민들과 역사 의식을 가진 모든 이들의 공동관심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崔씨의 증언은 개인적인 주관이나 생활신조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적인 이익에 봉사하는 일이요, 역사앞에 겸허히 자세를 가다듬는 일이기도 하다. 崔씨가 한 권력의 하수인이 아니라 한때만이라도 대통령으로 국정에 임했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평가되기를 바란다면 국익에 관한 개인적인 시각을 뒤로 하고 국민적인 관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와중에 휩싸였다는 사실 자체만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는 운명이나 우연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한 사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동료시민들을 위해, 또는 후대를 위해 증언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은 국방의무나 납세의무같은 법적 의무는 아니지만 사회계약의 일반원리 속에서 우러나오는 시민적 의무다. 그것은 서로 짐을 나누어 지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종의 품앗이같은 것이다. 아무도 이 기본적인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전직 대통령도 그 예외는 아니다. 후대를 위해서 비망록을 남기는 훌륭한 정치인들도 있다. 하지만 동시대인들의, 지금 여기에서의 공동이익을 위해서라면 진실규명을 필요로 하는 때 증언을 하는 것이 도리다. 사법이 국민의 사법이라면 진실을 알고자 하는 법원 증언에의 초대는 국민의 초대라는 사실을 유념하기 바란다. 오늘 국민의 초대를 받아 칩거하던 자택을 떠나 법정으로 향할 崔전대통령에게 아무쪼록 의미있는 외출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대통령들에게 너무 실망한 시민들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질만한 솔직한 증언을 듣고 싶다.김 일 수 <고려대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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