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27)

  • 입력 1996년 11월 28일 20시 13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 〈1〉 영화에서 이따금 격렬한 칼싸움 장면을 본다. 초반이라면 분명히 주인공이 이기게 되어 있다. 그런 믿음에도 불구하고 엎치락 뒤치락하는 긴박한 상황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게 한다.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런 긴박한 장면을 보면 나는 누가 이기든 빨리 싸움이 끝나기만을 바란다. 누군가 한 사람이 칼을 뺏기면 나는 그게 악인이든 선인이든 상관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격투 끝에 칼자루를 뺏긴 사람, 땀에 번들거리는 그의 얼굴은 차라리 평화롭다. 고통스러운 것은 싸움이지 승부가 아닐지도 모른다. 박지영이 다급하게 찾아와 그 소식을 전할 때 그녀는 평화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에는 싸움의 전조마저 엿보였다. 『그 소식 들었어요? 우리 과에 신임교수 하나 채용하기로 했다는 거?』 『아뇨』 내 주변에는 그런 소식을 전해줄 만한 사람이 박지영 자신뿐이었다. 『재단 쪽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오나봐요』 『그래요?』 『강선생, 그렇게 무심히 들을 일이 아녜요. 이건 우리 둘한테 떨어진 불똥이라구요. 우리 과에 교수 티오가 어디 있어요. 우리 둘 중에 하나를 재임용에서 떨어뜨리고 그 자리로 들어오려는 거지요』 『재임용 심사는 내년이잖아요』 박지영은 한가한 소리 말라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마 전부터 서울에 있는 대학 쪽으로 자리를 옮기려고 여러 통로를 통해서 선을 대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의 조바심 많은 성격을 부쩍 번거롭게 여기던 나는 그녀의 반응이 지나치게 소문에 민감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니나다를까 박지영은 내년이라는 시한은 재단에서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하고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지난 주 일이다. 그러나 오늘 박지영이 가지고 온 소식은 단순히 소문으로 듣고 흘려버릴 일이 아니다. 학장과 교학과장 앞으로 투서가 하나 날아들었다고 한다. 한 여교수의 문란한 사생활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나쁜 소식을 왜 하필 내가 전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한 뒤 박지영은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한다. 「여교수의 사생활」이라는 영화제목 같은 어절을 듣는 순간 나는 그 문란한 여교수가 누구인지 이미 눈치를 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글:은 희 경>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