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3〉
나는 석대째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박지영이 내 연구실을 나가며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본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안 그래도 재단에서 누구 하나 쫓아내고 자기 사람 심으려고 하는데, 하필 이럴 때 투서가 들어갈 게 뭐예요. 조용히 지나가진 않을 것 같고 강선생, 어떡해. 정말 걱정이네. 누구 짚이는 사람 없어요?』
『글쎄요…』
『그래도 상대남자 이름이나 소속은 익명으로 한 모양이더라구요. 아주 몰상식한 사람은 아닌가 봐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끄다가 불현듯 그 기사가 나던 무렵 경애의 말을 떠올린다. 윤선이 호들갑스럽게 소집을 하는 바람에 오르페우스에서 만난 날, 일찍 온 경애와 그런 얘기를 나누었다.
…네가 「베스트 우먼」에 났다는 건 다른 사람한테 먼저 얘기 들었어.
…누구한테?
…이종태 부인한테서. 미장원에서 그 책을 봤다더라.
얼마 전 종태가 찾아와서 그런 말을 했던가? 자기 아내가 날 찾아오겠다고 한다고, 성격이 고지식한 사람이라 정말 올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고?
나는 또 한번 고개를 젓는다.
의심한다는 것은 구차하고 졸렬하다. 내가 지금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지금까지의 등장인물을 모두 소집시켜놓고 그중에서 범인을 지목하는 추리소설의 마지막 장면도 아니려니와, 더욱이 나는 탐정도 아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오히려 사건을 일으킨 범인쪽에 가깝다.
차에 시동을 걸면서 나는 손이 약간 떨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시가지를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접어들면서부터 마음이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불행이 닥친 것을 알면 내게는 그 불행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는 방어작용이 거의 동시에 생겨난다.
이번에도 삶은 나를 앞질러갔다.
아무리 용의주도한 체하고, 미리 잘못될 경우를 예상함으로써 불행에 대비한다고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다. 정해진 일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자기가 갈 길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삶이 내주는 예제 중에서 한 가지 길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행동은 인간이 하지만 삶은 운명이 결정한다. 인간이 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니, 일찍 왔네?』
문을 열어주는 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등뒤로 전화벨이 울린다.
<글 :은 희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