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18〉
나는 학교에 나가 성적만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당 옆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김교수와 맞닥뜨렸다. 자동차 키를 잠그고 있던 김교수는 나를 향해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금 나오세요?』
나는 인사말만 던지고 재빨리 앞서서 걸음을 옮긴다. 그러나 김교수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나란히 걷기 시작하며 말한다.
『강선생, 남들 말에 신경쓸 필요 없어요』
『……』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잠시 떠들어대다가 그만 둘 거예요. 한국 사람이 원래 쓸 데 없이 흥분도 잘 하지만 또 잊어버리기도 잘 하잖아요』
날이 흐려서 하늘이 잔뜩 내려앉아 있다. 연구실이 있는 본관까지 가는 길이 꽤 멀게 느껴진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자니 상심한 사람같고 그러면 김교수가 더욱 위로를 하려 들까봐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나는 애리 이야기를 꺼낸다.
『여름방학 때 파리에서 제 동생을 봤다고 했죠? 지금 집에 와 있어요』
『아, 그 멋진 동생』
김교수는 금방 기억을 해낸다.
『그래, 여기 와서는 뭐해요?』
『전에 있던 직장으로 다시 들어가게 됐나봐요. 조그만 프로덕션이에요』
『디자인 공부는 그만뒀나 보죠? 대학 때 전공이 뭐였는데 프로덕션에서 일하죠?』
『신문방송학과를 다녔어요』
김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동안 말이 없다. 이윽고 내 쪽을 쳐다보며 입을 떼는데 표정이 잔뜩 민망해져 있다.
『강선생, 내가 강선생한테 미안한 일이 한 가지 있는데…』
내가 쳐다보자 눈길을 피하며 우물쭈물하기까지 한다.
『강선생 모교 신방과에 내 친구가 있다고 했잖아요. 얼마 전에 그 친구를 만났더니 강선생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자기 과 동료교수하고 강선생이 가까운 사이라고 말이죠』
그가 말하는 「동료교수」란 물론 현석이었다. 현석이 김교수의 친구에게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것은 나에 대한 현석의 태도가 적극적이고 현실적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현석이 내 얘기를 동료에게 했다는것,그말이 친구인 김교수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 그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내가 놀란 것은 김교수의 다음 말이다.
<글:은 희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