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46)

  • 입력 1996년 12월 18일 20시 48분


추락하는 것은 평화롭다〈20〉 십이월의 캠퍼스는 마르고 앙상한 것들로 가득차 있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오며 나는 어린시절 전학가던 때를 생각한다. 한겨울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교무실에 들어서자 톱밥난로 앞에 앉아 있던 담임 선생님이 부스스 일어났다. 정말 서운한데요? 어디 가든 이 놈은 공부 잘 할 겁니다, 하면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잉크를 찍어 서류를 다 채운 선생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운하다는 말을 한번 더 되풀이했다. 슬리퍼를 끌고 현관까지 따라나와 우리를 배웅도 했다. 나무가 심어진 자갈길을 따라 교정을 걸어나가면서 얼핏 뒤를 돌아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진희야, 선생님 아직도 저기 서 계시는데 돌아서서 인사 한번 더하고 가지 그러냐. 그러나 나는 그냥 터벅터벅 걷기만 했다. 이 학교에 오년이나 다녔는데, 서운하지? 라고 아버지가 다시 말했을 때에도 눈앞을 가로막는 성가신 잔 나뭇가지만 함부로 부러뜨리며 말없이 걸을 뿐이었다. 뒤돌아보기도 싫었고 서운해 하기도 싫었다. 나는 사람의 삶에 헤어짐이 수없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을 완전히 부려놓을 수 있는 장소, 거기에서 영원히 멈출 만한 시간이란 없었다. 삶은 흘러가는 것이다. 그 흐름에 따라 주소를 옮기는 것뿐인데 일일이 헤어짐을 기억해서 무엇하나. 지금도 나는 생각없이 걸음을 옮기고 있다. 지금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과의 헤어짐. 그것도 얼마 안 가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무 것도 바뀔 게 없다. 다중을 상대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도 시청률에 따라 중간에 막을 내려야 하고 신문사가 요구하면 연재소설도 부랴부랴 끝을 내야 하는데 하물며 몇 십명을 상대하는 강의를 내 대신 다른 사람이 한다한들 무슨 동요가 있을 수 있겠는가? 실패만 인정하면 된다. 내가 실패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현실을 견뎌내는 일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다. 몇 걸음 앞에 강당이 보였고 주차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서야 나는 문득 한가지 볼일을 빠뜨렸음을 깨닫는다. 사직서를 내지 않고 온 것이다. 어제 저녁 애리를 방에서 내보내고 써 두었던 그 사직서는 하얀 봉투의 입을 어설프게 다문 채 내 가방 안에 들어 있다. 학과장은 마침 연구실에 없었다. 나는 바로 앞방인 박지영의 연구실 문을 두드린다. <글:은 희 경>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