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우리는 지금 몇시인가

  • 입력 1996년 12월 18일 20시 48분


세밑이면 늘 스스로 묻게 되는 시간에 대한 자성(自省)이 있다. 손때 묻은 말, 「우리는 지금 몇 시인가」하는 물음이다. 이 물음을 덧없이 가슴에 새기게 하는 「12.12, 5.18 항소심 판결문」의 영탄조 국한문체를 만나면서 세모를 맞는다. 안방 PC에 인터넷이 뜨고 동화면의 뉴스가 흐르는 오늘 「항장(降將)은 불살(不殺)이라 감일등(減一等)한다」니, 이 무슨 병법론(兵法論)의 한 줄인가 싶다. 우리는 지금 몇 시인가를 넘어, 무슨 왕조, 어느 전국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나 묻게 된다. ▼「全―盧」「명퇴」多難의 한해▼ 지금은 몇 시인가 하는 물음은 내 집 골목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진 한해였다. 단독주택을 헐고 다가구 주택을 짓는 공사였다. 낡은 집을 헐고 새집을 짓는 일이 잘못일 리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새집이 가지는 삶의 질에 있다. 한 가구가 살 던 집이 헐리고 8가구가 들어서는 다가구 주택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그 생활공간의 좁음만이 아니다. 몇 천만원의 전세에도 다들 승용차가 있으니, 차 한대가 서던 집에 8대의 차가 들어서는 기현상이 만들어진다. 골목길을 차가 뒤덮고, 소방차도 못 들어오게 좁은 일방차로를 만들어 내는 삶의 하향지향이 한해 내내 이어진 것이다. 겉으로는 첨단의 정보화시대를 말하지만 우리는 또 얼마나 저 왕조시대적 표현, 「항장은 불살」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가.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수사(修辭)와 함께 시작된 한해를 보냈지만 역사가 아닌 현실로서의 우리의 모습은 어느것 하나 바로 선 것이 없었다. 개혁의 신선도가 사라진 정치, 모두가 한마음으로 걱정한 경제, 뒤틀린 남북관계, 부패불감증의 사회…. 개혁은 선도(鮮度)를 잃어가는데, 펄펄 살아서 「살 판」이 나 있는 곳은 대선(大選)이니 대권(大權)이니 하는 그 동네뿐인 한해였다. 명퇴 공퇴니 하는 말이 아버지의 자리를 뿌리째 흔들어 놓은 위기도 있었다. 내 주위에만도 그렇게 해서 젊음을 바쳐온 직장을 떠난 은행원 언론인이 셋이나 있다. 새삶을 찾아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게 아니라, 신발끈을 다시 매며 집으로 돌아간 그들. 이제 오십인데, 이제부터 인생이 익어가야 할 나이인데…. 생각하자면 가슴이 무겁다. 그런 아버지에게도 자식 기르는 근심은 그치지 않았다. 바뀐 대학입시제도가 조금이나마 개선의 밑그림을 만드는가 싶기는 하지만 「광란의 사교육비」는 이제 중학교까지 번져나가 더욱 극성을 부린다. 게다가 오늘의 삶이 가지는 허상, 그 공복감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남편이 아닌 애인, 오늘이 없는 전생(前生)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내 고향 강원도는 신고(辛苦)가 떠나지 않는 한해를 보냈다. 무르익은 봄날에 무슨 재앙인가, 고성 일대에 산불이 덮쳤다. 여름에는 물난리가 또 산하와 사람을 할퀴고 지나가더니 그래도 못다한 재앙이 있었던가. 무장간첩사건마저 터져나와 생활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나는 내 고향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소식에서 끝내 살아 움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희망과 감동을 본다. 고성 산불로 불타버린 나무들, 바로 그 나무를 깎고 다듬어 아름답게 빛나는 공예품을 만들어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재생인가. 삶의 역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은 이처럼 신선하고 감동적이다. ▼反轉과 감동을 꿈꾸며▼ 우리는 한해를 보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독일 어느 공동묘지에 적혀 있다는 묘비명의 말이 떠오른다. 「시간은 여기 있고, 사라져 가는 것은 우리들이다」. 고성 산불로 타죽은 나무의 또 다른 환생을 바라보면서, 그 감동을 잊지 않으려 애쓰며, 저 영원의 덫으로 사라져 가는 한해의 꼬리를 바라본다. 한 수 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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