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필드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이웃중에 30대중반의 자네트부인이 있다. 딸 친구의 엄마다.
그녀는 늘 활동하기 편한 바지와 스웨터 차림이다. 언뜻 보면 평범한 가정주부 같다. 그러나 세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소아과병원의 시간제근무 의사다. 남편 또한 대학병원 외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어린 자녀를 차로 등하교를 시켜주는데 자네트가 모는 차는 폐차장으로 가기 직전의 고물이다. 한국적 사고방식으로 「부부가 의사인데 왜 궁상을 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번은 자네트가 같이 갈데가 있다며 나를 데려간 곳에서 그런 생각을 씻어버렸다. 함께 간 곳은 어린이 중고 옷가게. 그녀는 아이들 헌옷을 잔뜩 샀다. 옷값은 개당 3천원정도. 그 이후 나도 그곳의 단골손님이 됐다. 그때부터 우리 아이들에게는 주로 헌옷을 입혔는데 한번은 새 옷을 입은 둘째아이가 『옷이 너무 빳빳해서 못입겠다』고 말해 한바탕 웃은 일이 있다.
한번은 자네트부인이 아이들 생일파티를 집에서 한다며 우리가족을 초대했다. 부부의사답게 으리으리한 집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생일파티는 너무 검소했다. 아빠가 직접 만든 생일 파티복, 엄마가 직접 깎아준 세 아이의 단정한 머리모습, 그리고 온가족이 함께 만든 생일케이크….
자네트네보다 훨씬 못살면서도 힘들고 귀찮다며 모든 것을 돈으로만 해결하려 한 나의 생활방식이 부끄러웠다.
그 후로는 나도 자네트처럼 남편과 아이들 머리를 직접 손질해 준다. 서투른 솜씨로 깎아준 머리지만 남편은 때가 되면 군소리 없이 내게 머리를 맡긴다. 가족 이발사가 된 후로는 남자들만 보면 뒤통수를 유심히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서울에서 끌고다니던 새 차를 떠올리며 늘 불만스럽게 여기던 우리집 고물차에 대해서도 더이상 불평하지 않게 됐다.
장미영 〈필자는 해외연수중인 공무원 남편과 함께 영국 셰필드에서 살며 남매(8세, 4세)를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