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광장/귀순자 체험기]『남녀가 친구라니…!』

  • 입력 1997년 3월 17일 08시 25분


지난달 밸런타인데이에 학교친구 몇명과 난생 처음으로 록 카페를 가봤다. 그러나 역시 안가느니만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춤을 전혀 추지 못하니 꿔다논 보릿자루일 수밖에 없었다. 현란한 조명과 고막을 때리는 음악소리가 즐겁기는커녕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한국에 온지 3년이 가까워지고 대학생활도 3년째에 접어들었어도 나에게는 여전히 「북한처녀」의 구석이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다니는 유아교육과는 여성천국으로 3학년은 30명 전원이 여학생이다. 그러나 수강과목에 따라 남학생과 같이 듣는 강의가 있다. 특히 동아리 활동에서는 남학생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성당에도 나가기 때문에 적잖은 남학생들과 접촉할 수 있다. 북한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느끼는 문화충격이겠지만 일부 개방적인 남한 대학생들의 행동은 놀랍다. 만난지 며칠이면 자연스레 반말을 하고 얘기 도중에 친하다는 표시로 어깨나 머리를 치는 정도는 보통이다. 좀 더 친해지면 남들이 보는 앞에서 가벼운 포옹도 서슴없이 한다. 그러나 그런 친구들도 나만 나타나면 갑자기 조심한다. 「예절의 원전」이 옆에 나타났다는 듯이 내 눈치를 본다. 이러다 보니 오히려 내 쪽에서 불편을 느낀다. 그래서 얼마전부터는 내가 전략을 바꿨다. 친구들 앞에서 일부러 말도 거칠게 하고 남학생의 어깨나 머리도 툭 치면서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친구들 눈이 둥그레지며 「너 어떻게 된 것 아니야. 괜찮아」하는 표정이 된다. 그러나 눈 딱 감고 당분간 그렇게 밀어붙여볼 생각이다. 그런데도 북한에서 중고교생활을 하면서 익힌 행실은 오래 간다. 지난 2년간 미팅을 한번밖에 못한 것이나 「아무래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아야 할까 봐」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도 적응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여전히 남존여비사상이 강하다. 남녀공학 고등중학교에서 어쩌다 「연애질」하다 들키면 생활총화(자기비판)시간에 나가 엄중하게 반성하고 비판받은 뒤 지도원 방에 불려다니며 며칠이고 비판서를 써야 한다. 심할 때는 퇴학을 당하기도 한다. 북한 남학생들의 입에서는 「남녀칠세 부동석」이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오죽하면 고3 막내동생 은룡이가 『남한에 와서 사정이 제일 좋아진 게 우리 누나야』라고 했을까. 내가 심야에 록 카페에 갔었다는 사실을 북한 친구들이 알면 놀라 자빠질 것이다. 〈여 금 주〉 필자약력△23세 △함흥 회상구역 햇빛고등중학교 졸업 △회상유치원 교양원 △가족과 함께 94년 3월 귀순 △중앙대 유아교육과 3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