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키조명이 번쩍이는 2평 남짓의 공간에서 디스크 자키(DJ) 최홍준씨(35)가 주정남의 「보고 있어도 보고싶은 그대」, 벅의 「맨발의 청춘」 등 요즘 「길보드 차트」를 휩쓰는 빠른 박자의 대중가요를 틀어주고 있었다. 두 대의 구내전화에선 벨이 쉴새없이 울리고 있었다. 이들의 팬인 빌딩내 의류상인들이 각 층 안내데스크를 통해 노래를 신청하거나 미아나 분실물을 찾아달라고 거는 것이다. 매장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의 곡명을 묻는 전화도 있었다.
서울 남대문과 동대문 일대의 의류상가에선 요즘 DJ들의 주가가 높다. 이들은 대형의류상가에서 근무하면서 유행곡을 전파하기 때문에 「패션DJ」 또는 「패션자키」라고 불린다.
보통 때는 음악계 이야기나 사회에 관한 얘기를 멘트의 소재로 삼지만 고객이 몰리는 오후 2∼3시나 오전 1∼2시엔 나이트클럽이나 록카페 등의 나이 어린 DJ처럼 괴성을 지르면서 흥을 돋우기도 한다.
최씨는 『고객이 밝고 빠른 음악을 들으면 물건을 살 때 덜 망설이게 된다』고 말했다. 물건을 사고나서도 기분좋게 되기 때문에 의류상가에서 DJ들을 채용한다는 것.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소매상들 중 이곳에서 귀에 익은 음악들을 자신의 가게에서 틀어주는 이가 많아 패션DJ들이 많이 틀어준 노래가 곧바로 전국적인 히트곡이 되기도 한다. 최근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 김기하의 「나만의 방식」, 정승준의 「사랑을 고백할 때」 등의 노래가 이곳에서 히트한 뒤 방송을 탔다.
음반업계에서도 이곳에서 어떤 노래를 틀어주고 있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뮤직박스마다 매주 2,3명의 음반회사 관계자와 가수, 프로모터 등이 인사차 찾아온다. 거평프레야 뮤직박스의 경우 5백여개의 CD중 70여개가 홍보용 CD였다.
의류상가에서 일하는 DJ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으로 70년대 음악감상실, 80년대 음악다방에 본거지를 뒀던 「다운타운 DJ」의 명맥을 잇고 있다.
패션DJ는 80년대말 남대문시장에서 첫선을 보였다. 낮에는 음악다방에서 일한 뒤 밤에 이곳으로 와 부업으로 일했다는 것. 유흥업소 심야영업 금지조치때 수가 약간 늘었다. 음반업계에서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2,3년 전. 종로일대 포인트 호다방 등 10여개 음악다방들이 문을 닫고 때마침 동대문 일대에 들어선 대형 의류상가에서 이들을 채용하면서부터다.
현재 남대문시장의 커먼프라자 랭땅아르떼 등과 동대문시장의 팀204 디자이너클럽 등에서 30여명의 패션DJ들이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