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김명인 시집 「바닷가의 장례」…話頭 「그리움」

  • 입력 1997년 3월 24일 17시 06분


"세상은 봄 천지지만 이제 곧 홍수가 닥칠거야/그 시절처럼 암수짝을 맞춘 날짐승들이 숲을 향해/줄지어 날아간다/사흘째 비가 내리고 빗줄기 속으로/세상이 잠겼지만/날이 개자 꽃 다 버린 교정 어느새/방주 떠나고 없고/건널 수 없는 물길처럼 아지랑이/ 빈 운동장 가득 출렁인다 이 아득한 봄날 지나면/세상은 또 바뀌어야 하나, 산정 가까이 한 척 배가/다시 와 닿고 있다"(방주) 해마다 봄이면 새 시집들이 새순 돋듯 터져 나온다. 올 봄에도 예외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시집들 가운데 중견시인 金明仁씨의 다섯번째 시집 「바닷가의 장례」(문학과 지성사刊)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바닷가의 장례」는 73년 등단이후 한결같이 나직한 목소리로 "경험할수록 곤고한 시간들로 이어지는" 삶을 노래해온 金시인이 새로운 세상을 앞둔 세기말,"나를 통째로 바꾸지 않고서는 내 시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면서 내놓은 시집. "너는 희망을 말하지만/나는 가정의 한 끝을 지적했을 따름이다/길이 닫히고/길 밖에서 서성거리던 풍경들 지워진다/누구나 고단하게 저의 행로를 끌고 간다면/오늘 잡은 물고기들 다 놓아주리라, 내 상상은/수만 리 먼 바다를 돌고 오는 연어도/식당 한구석에 놓인 수족관 속/열대어의 유영으로 겹쳐 보인다"(내 물길로 오는 천사고기) "…아니다, 비 오기 전에는 비가 오기까지/예측되는 짧은 순간이 있다. 나는 오래 예측되면서/사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것 조차 욕망의 흔적이라면/나는 흘러가 버리는 시간의 앞뒤 순서를 늦게라도/뒤바꾼다. 비 오기 전에도 달은/구름 사이에 있거나 구름 속에 있었다/내가 본 것은 금방 지워질 내 알리바이일 뿐, 비가 와도/ 달은 중천을 건넌다…나는 이제 증명하지 않는다/살아 내기에도 우리 인생 너무 벅찬 것이다…/저문 뒤에도 우리 길 여전할지/내리기 시작하는 비에 겹쳐 모든 생각 지우면서/후미진 골목 끝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비 오기 전에) 이 시집에서 시인은 쓸쓸한 삶의 풍경속에서 희망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란 가정일 뿐이며 이 세상 바깥은 온통 어둠속에 잠겨 있다. 이 세상을 끝까지 따라가보면 그 경계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인은 그 경계의 순간들을 특유의 섬세함으로 포착하여 쓸쓸함을 이겨내는 긴장과 아름다움의 시들을 뿜어내고 있다. "…밤안개 속으로 혼자 걸어오다 깨우치는 생각이 있거나/헤매온 죄와 건너지 못한 병으로 가로막힌/이 여행길의 끝을 미리 만나기도 한다/그때 죽음은 수삼 편 무거운 바람이 아니라/키 큰 접시꽃에 머물던 벌나비떼로 날아올라/민박집 뜨락을 뒤덮는 만발한 별자리에도 옮겨 앉는다…"(부활) 문학평론가 황현산씨는 金시인을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시적 섬세함을 모질게 지킴으로써 삶의 장애를 열어제친" `섬세함의 시인'으로 지칭하면서 그의 새 시집에서도 첫 시집 「동두천」에서 94년의 네번째 시집 「푸른 강아지와 놀다」에 이르기까지의 시들을 관통하는 주제(그리움)에 있어서는 변한 것이 없으나 `그리움'이라는 운명의 깊이와 질에 대한 명철한 인식에 있어 시인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평하고 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