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崔明姬(최명희)씨는 이래 저래 서글프다. 예전에는 너무 알아주지들 않아서 비통해하고 좌절속에 살았다. 평단의 제제다사(濟濟多士)들은 그녀를 외면했다. 정말이지 그 흔한 평론 글줄사이에, 단 한줄이라도, 욕이라도 좋고,혹평도 좋으니 이름 한번 불리기를 소망하던 때가 있었다.
데뷔한지 17년여, 그렇게 밤낮 외로움에 떨며 뒤척이며 살았다. 80년 신춘문예 단편소설이 당선되고, 이듬해 장편공모에 「혼불」이 뽑혀 작가가 되긴 했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세월이 너무 길었다. 그녀는 2백자 원고지를 적소(謫所)삼아, 그 칸칸에 슬픔과 외로움의 살점을 나누듯, 절망의 피를 찍어 유서를 남기듯 혼불에 매달려 왔다. 그렇게 잊혀진듯 살아온 그 여인은 벌써 나이가 쉰, 아직 미혼이다.
그런 그녀가 지난 연말부터 돌연 벌떼 같은 인터뷰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혼불이 전작 10권째 묶였다는 게 그 계기다. 전에 써온 혼불 작품 그대로일 뿐 개작한 것도 아니다. 최명희가 달라진 것도 전혀 없다. 연작의 10권째가 출판되었다는 그 하나만의 이유로 평자 독자들의 관심이 이상할 정도로 달아올랐다. 갑자기 수십만권이 팔려 출판사를 놀라게 했다.
▼ 작가 최명희씨의 고역 ▼
그렇다면 지난 세월의 냉대와 무관심은 무엇인가. 지금의 들끓는 반응은 또 무엇인가. 그도저도 아니라면 둘다 합쳐진 모순의 앙상블일 터이다. 바로 그 점이 서글픈 것이다. 혼불이 다 타오른 것도 아닌데, 대작의 완성처럼 말해지는 것도 그녀는 두렵다.
그녀를 절망케 한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계의 패거리병이다. 한 패가 아니면 돌보지 않고, 지연 학연같은 끈을 맺고 한 울타리를 이루어야만 밀어주는 병. 그리하여 홀로 무섭게 천착하는 외곬의 노력가 능력가를 영영 파묻어버리는 병. 재능 업적보다 교제와 정치로 살아남는 얼치기를 늘리는 반(反)문화의 고질.
또 있다. 남들이 떼를 이루어 읽고 보고 떠들고 사면 뒤질세라 뛰어드는 들쥐병이다. 겉으로 드러난 성취에만 눈길을 주고 귀기울이는, 그리고「아까운」실패나「값진」 좌절은 쳐다보지도 않으며, 늘 냄비처럼 들끓고 소란한 시행착오만 되풀이 할 뿐 축적은 못남기는 우리의 불치병.
그래서 일것이다. 책을 찍는 사람도 김현철(김현철)을 팔려 하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이도 정치판에 뛰어들며, 의사도 권력자나 그 가족에 다가서려 하려는 것도 다 그래서 일 터이다. 작가 최명희와 우리 가슴속의 패거리 들쥐병을 곱씹어 본다.
▼ 김현철씨와 「패거리病」 ▼
그리고 문득 오늘날 국가적 소란의 한가운데서 떨고 있는 대통령 아들의 운명을 생각한다. 그도 역시 한없는 서글픔을 느낄 것이다. 밀물처럼 다가왔던, 이권과 편의를 겨냥한 갈채와 아첨의 패거리들이 썰물처럼 사라져간 지금,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팔매와 삿대질과 마주하면서.
어린 시절, 춤을 그리도 앙증맞게 잘추어 金泳三(김영삼)의원의 친구나 정치문하생들을 즐겁게 해주었다는 김현철, 그는 성년이 되어서도 패거리 들쥐떼에 놀아나고 「춤추다」 흉화를 맞은 셈일까. 그의 오만이나 방자함을 덮고 싶은 생각은 없다. 대통령의 무지를 호도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다만 그 허물들이 모두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청와대비서나 친인척을 통해서라도 뭔가 편의 누리고 성사시키려 하는 내 가슴속의 「들쥐」를 다스릴 수 있느냐를 자문해보자고. 그리고 홀로 쓸쓸히 제 일을 지키며, 혼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외톨박이들을 실로 귀하게 여기는지도 솔직히 자문해 보자고.
김충식(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