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떡값」받은 것도 사생활인가

  • 입력 1997년 4월 5일 20시 21분


한보 鄭泰守(정태수)씨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의 명단을 공개하면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다는 金起秀(김기수)검찰총장의 말은 설득력이 없다. 국민을 대표하는 공직자인 국회의원이 수천만∼수억원씩 몰래 돈을 받은 것을 보호해야 할 사생활로 볼 수는 없다. 공인(公人)이 직책과 관련해 돈을 받았다면 사사로운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김총장은 대가성(代價性)이 없는 정치자금 수수는 처벌할 수 없게 돼 있는 정치자금법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한 것같다. 그래서 이미 보통명사화한 「떡값」 대신 굳이 「정치자금」이란 용어를 썼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의 주장은 법의 정신을 간과한 것이다. 정치자금법 제1조는 「정치자금의 적정한 제공」을 강조하고 「그 수입 지출상황을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제2조도 「정치자금은 국민의 의혹을 사는 일이 없도록…그 회계는 공개되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자금은 어디서 조달해 어떻게 썼는지 국민앞에 공개토록 규정한 것이다. 법이 이런데 이를 밝히는 것이 사생활 침해 우려가 있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차라리 정씨 돈을 받은 정치인은 개인적 친분관계로 「떡값」을 받았을 뿐이고, 이는 반드시 밝힐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면 이해하기 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떡값」도 상식선을 벗어난 거금이면 정치자금과 무엇이 다른가. 이밖에도 그저께 국회 한보특위 국정조사에서 김총장이 답변한 내용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가 실재(實在)한다고 시인하고 명단을 국회에 통보할 수 있음을 시사한 건 큰 소득이지만 그의 답변태도는 검찰이 모든 의혹을 철저히 파헤쳐 공개할 의지가 있는지를 의심케 했다. 우선 「정태수 리스트」를 확보하고도 범죄요건이 되는지 안되는지 수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발뺌부터가 그렇다. 또 한보수사가 대선자금 수사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 대목도 검찰이 한계선을 그어놓고 수사한다는 인상을 짙게 했다. 김총장은 특위의 추궁에 못이겨 결국 「정태수 리스트」를 국회에 통보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정말 공개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엔 아직 이르다. 돈 받은 것이 죄가 되는지 확인하고 검토해본 뒤 결정하겠다는 것은 통보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물론 정치권의 눈치를 보아가며 통보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추단하는 것도 성급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부에서 그런 의구심이 제기되는 것은 그동안 검찰수사가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법은 정치자금의 흐름을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돈받은 정치인을 감춰주는 것은 사생활 보호가 아니다. 「홍인길 리스트」, 「한보 리스트」 등 쏟아지는 리스트 의혹들을 차단하기 위해서도 「정태수 리스트」는 빨리 공개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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