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화사하면서도 잔인한 것 같다. 개나리꽃이 피고 진달래꽃이 이 산 저 산에 화려하다. 일본인들은 벚꽃을 영주(領主)를 위하여 한 목숨 바치는 충성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왜 우리 시인들은 진달래꽃을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는 꽃」 또는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선구자」의 꽃이라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체제의 꽃이 아니라 「불행한 수난」의 꽃이었다.
▼ 발자크가 본 정치가 ▼
화려한 꽃, 화사한 봄에 슬픔을 되새겨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봄날에 얽힌 기억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3.1운동도 그렇지만 해방 반세기 동안 봄날에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4.19도, 5월 광주 항쟁도 그렇고 거기에 이르는 그 많은 유혈과 고난을 생각하면 슬프고도 슬픈 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 우리는 잊혀졌던 제주도의 유혈 4.3사건도 첨가해야만 할 것 같다.
다행히 민주화한 이제는 유혈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하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이 봄날을 어둡게 한다. 역시 화사하면서도 잔인한 봄이다. 고대하던 민주화의 사회, 세계화니 도덕국가니 역사 바로 세우기니 아름다운 말잔치 속에서 일어난 한보니 김현철씨 문제니 하는 기상천외의 일들 앞에서 우리는 거의 일손을 멈추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세기사적인 중대한 시기에 말이다.
우리는 두고두고 왜 이런 역사가 벌어졌는가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문득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발자크의 작품세계가 머리에 떠오른다. 그 당시 어떤 문예비평가는 이렇게 기록했다.
「은행가란 남몰래 도적질과 폭리에 의해 재산을 모은 자들이고 정치가는… 배반의 수를 거듭함으로써…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실업가는 신중하고 교묘한 사기꾼이고… 문사(文士)는… 자기 의견과 자기 양심을 언제나 팔려고 내놓는다」.
이것이 발자크가 그린 작품세계라는 것이다. 오늘 그가 이 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이 사회를 어떻게 그릴 것인다.
우리 국민 모두가 이런 현실을 혐오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래서 궐석된 구청장을 뽑는다니까 불과 20몇%의 유권자가 투표장에 갔고 지난번 인천과 수원 보궐선거 때에는 간신히 30몇%가 투표에 참가했다. 그래도 승리했다고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유권자의 10몇%, 기껏해야 20%가 될까 말까하는 표를 얻고 환호성을 올린 셈이다.
▼ 「배반」당하는 국민들 ▼
금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도 말하자면 「배반의 수를 거듭함으로써」 유명해진 사람들 속에서 대통령을 선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그 배후에서는 또다시 남몰래 도적질하는 은행가, 신중하고 교묘한 사기꾼, 자기 의견과 양심을 파는 세력이 춤을 출 것인가. 그런 정치인의 정당을 통하지 않고서는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내세울 수 없다는 데 현대정치의 비극이 있다. 그분들은 국민들이 선거에 냉담해져도, 아무리 소수표라도 승리만 한다면 또다시 샴페인을 떠뜨리고 환호성을 지를 것으로 보인다.
정말 슬픈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처럼 처절하게 그려졌던 19세기 프랑스 사회도 구출됐다. 그것은 그런 정치인 자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에 분개하던 프랑스 국민에 의해서였다는 것을 우리는 되새겨야겠다.
지명관 <한림대교수/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