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다 배에 시인이 누워 술 한잔 마신다.
「노령서 시작한 술 끝내니 통영/한려수도를 마음 속에 넣고 놀았구나/갑판에 소주병들이 멋대로 누워있고/소리없이 봄저녁이 와있다/사방 파도들 석양 물에 젖어/우리 마음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듯/…/(나도 이바다에서 너울대며 빠져나갔으면!)/여기서 그대 그만 내리게/바다 위에 큰대(大)자로 누워 나는/알맞게 어두워 내가 안보일 장승포로 가겠네」(「봄바다」일부).
시 속의 나는 비어 있음이다. 나는 일상적이지만 비어있는 나는 일상적이지 않다. 사소한 것에서 삶의 통찰에 이를 수 있는 시인만의 능력….
「이것 봐라/나는 발가락 하나하나의 무게까지 섬세하게 찍혀있는/새발자국을 좇고 있군/…/벌렁 뒤로 한번 넘어졌다/눈 위에 큰대(大)자를 찍었다/일부러 또하나 찍었다/…/허전한 자리에/하나 더 찍었다/내일쯤 눈 위에 큰대(大)자 암호 보거든/그대 농장에서 한시간쯤 살다간/외계인의 자취임을 알아다오」(「외계인1」 일부).
외계인에게 이 지구는 얼마나 신선하겠는가. 황동규의 시편들은 온통 새로움이다. 시인에게 새로움은 도처에 있다. 대천 근처의 뻘밭에도, 황금 들판에도 있다.
시를 읽다보면 움직이는 화면이 따라온다. 움직임은 선명하고 경쾌하다. 「금 이삭이 손등 쿡쿡 찌르고/바지 밑으로 들어와 종아리 찔러/시간이 금빛으로 졸아들고/…/아 뺨에 금 채찍, 이 찬란함!」(「뺨에 금 채찍!」일부). 그리고 몸은 가벼워져 하늘로 솟아오른다. 지상의 번잡함 모두 털어버리고.
황동규 지음(문학과 지성사·4,000원)
〈이광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