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에 젖은 이의 머릿속을 비추는 듯한 비사실적인 화면, 환한 원색의 채용, 원근법을 무시한 구도와 단순화한 선들. 이 책에 삽입된 김병종씨의 그림들은 샤갈의 한국화판을 보는 듯하다. 서울대 미대 교수로 몸담고 있는 한국화가인 그가 최근 10년간 써온 수필을 모은 책. 그 단상들은 이같은 화풍을 문자화한 것이라 봐도 좋다.
기독교 신자로서 자기 삶의 성속(聖俗)을 일치시키려는 노력과 세월 속에 빛이 바래 가는 여인들에 대한 추억을 몽롱하게 떠올리는 필치 또한 샤갈과 닮았다.
「순교자도 마지막 죽음만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맞기를 원한다던가. 사람처럼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는 생명체가 또 있을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의 중심을 응시하시면서 믿음의 분량과 순도를 가늠하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를 누나처럼 어머니처럼 감미로운 감정으로 따랐다. 나는 그토록 예쁜 우리 선생님이 왜 그렇게도 늙어보이는 사람과 좋아 지내는지 분통이 터져 견딜 수 없었다」
그의 글들은 「수필은 기억과 망각의 조화」라는 대원칙에 충실하다. 그는 적나라한 현재의 사실보다는 차라리 감미로운 과거의 환상에 젖어들고 싶어하는 것일까.
더불어 예술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의, 지필묵을 손에 든 한국화가로서의 고집도 글 속에 배어 있다. 예술가다운 나르시시즘과 시시콜콜한 것들에서 기쁨과 좌절을 느끼는 섬세한 자존심도 드러난다. 그는 『천재는 순간의 순발력이 아니라 재능을 안배하여 평생 발휘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화가의 수필은 그 안배를 위한 자기 정돈이 아닐까.
김병종 지음(서울대출판부·15,000원)
〈권기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