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정운찬/어설픈 시장주의

  • 입력 1997년 4월 23일 20시 18분


김영삼정부의 여섯번째 경제팀이 시장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지 두달이 되어간다. 그러나 구조조정 3개년계획의 아이디어가 튀어나온 이후 새 경제팀이 표방하는 시장주의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졌다. 더구나 재벌그룹을 위해 「부실징후기업 정상화 촉진과 부실채권의 효율적 정리를 위한 금융기관협약」이란 실로 기발한 이름의 제도까지 만들어 기업의 진입 퇴출과정에 기형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보고는 과연 새 경제팀의 시장주의가 튼튼한 기초 위에 서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고 어설픈 시장주의가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할까 두려워 시장과 시장주의에 대해 몇마디 적고자 한다. ▼ 부실방지 대책의 허점 ▼ 시장주의는 정부의 지나친 규제가 기업활동을 제약했고 그 결과 경쟁력이 약화되었으므로 과감한 규제완화로 경제의 활력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일리있는 말이다. 정부는 과거에 무분별한 규제를 일삼아 온 것이 사실이고 그동안 규제가 많이 풀렸다고는 하나 아직 풀어야 할 규제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규제만 풀면 믿음직한 시장이 생겨날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시장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경제거래를 하면서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사회제도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어떤 규칙을 가지고 모이느냐에 따라 시장의 질서는 달라지고 그 성과 역시 각양각색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시장의 질서는 자연의 섭리와는 구별된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연질서와는 달리 시장의 질서는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거역할 수 있고, 또 거역해도 처벌받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재벌은 시장참여자이면서도 탈세 내부자거래 담합 등을 통해 시장질서를 어겨왔고 때로는 시장질서의 형성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 공정하지 못한「게임 룰」 ▼ 어떻게 보면 시장은 게임과 같다. 경기자들이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공정한 룰에 따라 최선을 다해 경쟁하고 그 결과 가장 효율적인 사람이 가장 높은 보수를 얻을 때 시장은 훌륭한 모습을 띠게 된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실적으로 볼 때 모든 게임의 룰이 항상 공정한 것만은 아니며 모든 경쟁이 사회적 효율성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니다. 불공정한 게임룰의 대표적 예로는 이번에 제정된 「부실징후 기업에 대한 금융기관협약」을 들 수 있다. 단지 여신잔액 규모가 일정한 크기 이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벌기업이 특별대우를 받는다면 이미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결국 불공정한 경쟁은 적자(適者)가 아닌 강자(强者)가 경쟁의 승자로 선택되기 때문에 자원의 효율적 배분이 어려워진다. 효율성을 저해하는 비생산적인 경쟁의 예도 얼마든지 있다. 대학입시경쟁 촌지경쟁 뇌물경쟁 등에서는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자원배분의 왜곡이 심해진다. 이처럼 시장은 언제 어디서나 훌륭히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무턱대고 경제를 시장에 맡기자고 하기 전에 진정한 심판의 입장에서 룰을 만들고 또 이를 어기는 자를 징계하는 시장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때로는 심판이 고질적으로 규칙을 안지키는 경기자를 과감히 퇴장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관중들은 그 경기에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새 경제팀은 이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정운찬<서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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