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에 살얼음판 같은 혼란이 번지고 있다. 금융기관들이 최근 신규대출을 중단하고 기존 대출금까지 대거 회수하는 바람에 자금한파(寒波)가 몰아닥쳤다. 회생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기회를 주자는 취지의 금융기관 부도방지협약이 오히려 부도를 부르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정책의 효율성과 문제점을 치밀하게 검토 하지 않고 협약을 졸속 추진한 결과다.
은행들이 어느 업체를 부실징후기업으로 지정하면 대출금 회수가 상당기간 어렵기 때문에 제2금융권이 자금회수에 나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제2금융권은 최근 한주일 동안 무려 6천억원의 대출을 줄이는 등 앞다투어 대출금회수 및 신규대출중단에 나섰다. 일부 금융기관은 부실징후기업 리스트를 만들어 어음을 무더기로 돌리고 대출회수에 나서 멀쩡한 기업의 흑자도산이 우려된다. 여기에 은행까지 자금회수에 가세해 금융시장이 대 혼란에 빠졌다.
당장의 금융혼란을 진정시키려면 금융기관들이 이기주의적인 자금회수를 자제해야 한다. 정부는 향후 부실채권 정리과정에서 금융기관의 피해를 최소화할 대책을 내놓고 금융권을 안심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추가대출 부담을 지우지 않는 등 제2금융권의 부도방지협약 참여유도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이번 협약 추진 과정에서 정부 스스로 경제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에 먹칠을 한 것은 또다른 문제점이다. 정부는 그동안 줄곧 시장경제와 민간자율을 강조해 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진로그룹이 부도위기에 직면하자 은행들로 하여금 협약을 체결하고 자금을 지원토록 「지시」했다. 때문에 관치(官治)금융으로의 회귀라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관해 납득할만한 설명과 방향제시가 있어야 한다.
국내 19위 대그룹인 진로가 도산하면 연쇄부도 등 후유증이 크기 때문에 급하게 협약을 만들고 지원키로 한 대목은 지금의 어려운 현실에 비추어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삼미그룹이나 세계적 천막제조 유망중소기업인 교하산업의 부도처리가 엊그제였음을 돌이켜볼 때 왜 유독 진로의 회생에 정부가 적극 나서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아울러 부도방지협약이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을 해소하는 데만 초점을 맞춰 운용되는 것도 문제다. 빚이 많은 대기업은 추가 자금지원으로 살리고 중소기업은 도산시켜도 은행 피해가 적으니 회생대상에서 제외하는 식으로 운영되어서는 곤란하다.
재정경제원은 부도방지협약과 함께 성업공사를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정리 및 부실징후기업 정상화지원 전담기구로 개편할 방침이라고 한다. 경영관리위원회는 회생시킬 기업을 선정하고 지원규모와 방법 등을 결정하는, 그야말로 기업의 생사여탈(生死與奪)권을 갖는 기구다. 누가 보아도 승복할 수 있도록 공정하고 투명한 운영기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