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이야기]『이땅을 떠나고싶다』 이민자 부쩍 늘어

  • 입력 1997년 4월 27일 08시 46분


시청률 조사기관에 따르면 「한보 청문회」를 TV로 지켜보는 시청자의 70%는 40대 이상이다. 20대이하 세대처럼 아예 현실정치에 신경을 끊고 살 수는 없어 오며가며 TV에 눈길을 꽂았던 30대는 이렇게 중얼거렸을지도 모른다. 『이 나라에 희망이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이 땅을 떠나고 싶다…』 이민을 꿈꾸고 실제로 떠나는 30대가 부쩍 늘고 있다. 최근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이 대도시 학부모 8백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에 따르면 10명중 3명은 지나친 과외비부담을 피해 이민이나 조기유학을 고려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민을 주선하는 각종 해외이주공사에는 3,4년전부터 30대의 이민상담이 눈에 띄게 늘었다. 평일 낮에 열리는 이민설명회에도 30대 넥타이부대들이 북적댈 정도다. 주부 김선희씨(36·서울 은평구 역촌동)는 지난달 캐나다 이민설명회를 다녀왔다. 친구들을 만나면 한번씩은 꺼내는 얘기, 『이민가는게 백번 났다』는 말을 절반쯤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가 늘어놓는 이민사유는 이렇다. 『두 아이 과외비에 벌써 허리가 휜다. 일류병도 입시지옥도 과외도 없는 나라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 굴지의 보험회사에 다니던 C대리(35)는 얼마전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다. 「보다 나은 삶을 찾아서」가 그가 남긴 이민 이유. 수준급은 되는줄 알았던 영어마저 현지에선 제대로 안 통하니 답답하긴 해도 고생은 각오한 바다. 약간의 향수병을 앓는 아내와는 달리 일곱살과 다섯살짜리 두 아이는 저희 나름대로 잘 적응하는 것 같다고 전한다. 지난달 잘 다니던 대기업에 사표를 내고 캐나다이민을 준비중인 강정은씨(33)는 좀 색다르다. 오랫동안 별러오던 미술유학을 떠나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다 영주권이 있으면 학비가 9분의 1정도 밖에 안되는 것을 알고 이민을 결심했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일」만 알고 결혼같은 개인사쯤은 사소한 일로 여겨왔으나 명예퇴직으로 불시에 쫓겨나는 선배들을 보며 마음을 돌려먹었다. 『우리들 30대는 20대처럼 어학연수도 배낭여행도 못간 세대죠. 그렇지만 「이 땅에 벌여놓은 것이 무서워서」 엄두도 못내는 40대에 비해 과감히 새 삶을 개척할 용기는 지니고 있어요』 이같이 30대 이민의 가장 큰 특징은 「삶의 질」을 찾아 떠나는 「얼터너티브 이민」이라는데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허리띠 바짝 죄고 맨주먹으로 밑바닥부터 뛰었던 60, 70년대의 이민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집팔고 사업체 팔아 돈싸들고 가는 「투자이민」에 비해 학력 경력 어학실력을 믿고 떠나는 「독립이민」의 숫자를 비교해보면 고학력 엘리트 30대가 상당수 빠져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수년 사이에 30대 이민이 급증, 지난 93년부터는 독립이민이 투자이민의 두배에 이르고 있는 것. 한국이주공사의 최형란부장은 『나이든 사람들은 벌어둔 돈으로 여유롭게 살고 싶어 떠나는 반면 30대는 전문기술과 학력 경력 어학실력을 무기삼아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이민을 간다』고 들려준다. 그러나 두가지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보랏빛 꿈을 안고 떠난 남의 나라가 「공짜로」 삶의 질을 보장해줄 것인가, 그리고 내 부모가 살고 내 젊은날을 바친 땅을 「더 나은 삶이 있는 곳」으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인가…. 〈윤경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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