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학생운동의 산 증인」 林善雄(임선웅·57)씨.
지난 21일 36년간 몸담았던 서울대를 명예퇴직하고 떠나던 날 임씨는 마지막으로 학생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짧은 반바지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여학생,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남학생, 손을 맞잡고 스스럼없이 캠퍼스를 활보하는 커플….
『참 많이 변하긴 변했구나』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머리를 스쳤다.
임씨가 학교를 떠나기 전까지 몸담았던 곳은 대학본부 학생과. 지난 62년 행정서기로 서울대에 첫 발령을 받은 뒤 각 단과대를 거쳐 66년 상대 학생과를 시작으로 31년간 줄곧 학생과에만 근무했다. 유신정권과 5,6공 시절의 한가운데에 있었기에 자연히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는 것이 임씨의 가장 큰 임무였다.
64년 6.3사태, 80년 서울의 봄, 87년 6월항쟁…. 한국현대사의 주요 고비를 임씨는 때로는 「감시」하고 때로는 「보호」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했다. 서울대 사찰담당 경찰관이었던 차익수씨와 함께 학생운동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여서 사태가 터질 때마다 역대 총장들이 그를 찾았다.
『84년인가 「임선웅은 학생사찰의 앞잡이」라는 대자보가 붙은 적이 있습니다. 직무에 충실했던 것 뿐인데 착잡하더군요. 하지만 운동권 학생들이 졸업한 뒤에도 가끔 찾아오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만 기억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임씨가 이뤄낸 가장 의미있는 일은 학생운동에 관한 각종 자료를 수집한 것.
「前夜(전야)」 「자유의 종」 「議壇(의단)」 등 학생들이 만든 각종 신문과 「깃발」 「아방타방」 등 지하학생운동 조직의 핵심 선전물까지 한국학생운동사의 주요 희귀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지난해 서울대 박물관에 수천종에 이르는 이 자료들을 기증한 임씨는 『언젠가 학생운동기념관이 들어서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뿌듯해했다.
임씨는 『70년대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은 순수성을 바탕에 깔고 있었으나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수한 의미의 학생운동은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고 말했다.
〈금동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