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김정현/세상의 모든 어버이들께

  • 입력 1997년 5월 7일 20시 01분


이 시대에 회자되는 우화 중에 「만득이 시리즈」가 있다. 싫다는 데도 지겹도록 따라다니는 눈치없는 귀신과 그 귀신을 골탕 먹이며 도망가는 만득이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낸 이들은 재기발랄한 우리의 신세대들이다. 무엇이든 한 시대를 풍미하자면 그 안에 깊은 뜻이 숨겨져 있게 돼있다.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장 유력한 해석은 주인공 만득이가 우리의 신세대, 자식들이라면 눈치없는 귀신은 구세대, 바로 우리의 어버이라는 것이다. ▼ 눈치안보는 자식사랑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그 가슴 저미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이 귀찮기만한 간섭으로 받아들여져 「만득이의 귀신」으로 전락하다니. 운명적으로 어버이의 자리는 베풂의 자리다. 세상에 자식으로 태어나 어버이의 사랑을 거름으로 그 자신이 어버이가 되고 다시 자기가 받은 사랑을 베풀어 자식을 어버이로 키우는 윤회(輪廻)의 업(業). 그러나 아무리 타고난 업에 의한 베풂의 자리라 할지라도 그 애절한 사랑의 외침이 메아리조차 없는 외로운 음성으로 흩날려 버려서야. 몹시 서러우셨던 모양이다. 고단한 삶에 지쳐 그렇게 먼저 가신 어버이가 그리웠음인가. 자식에게 보낸 반응없는 사랑의 몸짓이 못내 안타까웠음인가. 세상에 내놓아진 「아버지」란 이름의 작은 이야기 책 한권을 찾아나서던 그 발길들. 교보문고 그 큰 매장 저쪽 끝 입구에서부터 『「아버지」 어디 있소』 『「아버지」 어디 있소』를 외치며 들어서던 굽은 등, 처진 어깨. 얼마나 콧등이 시리던지. 그 모습에 눈시울이 아려 몇번이나 외면하고 돌아섰는지 모른다. 만남의 자리마다 그 분들은 말씀하셨다. 『이건 내 이야기야. 내 마음이야』 당신의 마음을 도둑 맞았다며 마음값 내놓으라시던 그 농담 속에 감춰진 진한 여운이 지워지지 않는다. 세상 대부분이 받는 쪽에서 갈증을 느끼건만, 유독 어버이의 자리만은 주면서도 갈증을 느낀다. 더 많이 주지 못해, 더 버젓한 어버이로 자식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지 못함을 미안해 하며 스스로 죄인이기를 자처하는 그 사랑이 눈물겹다. 아무리 세상에 태어나 어버이가 되는 그날부터 아쉬움의 한(恨)을 어깨에 걸머져야 하는 명운이라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의 어깨가 삶에 짓눌려 고단해 보일 때, 마저 버리지 못한 회한에 인생이 덧없어 허무한 한숨을 토해낼 때, 그 때만이라도 그 어깨의 짐을 대신할 수 있다면…. ▼ 오늘이 바로 당신의 날 오늘 어버이 날. 이 하루만이라도 그런 날이면 좋으련만. 어버이 당신들은 오늘도 그 어깨의 짐을 그대로 걸머진다. 아침, 고단한 출근길의 그분들은 아마도 엊그제 어린이날 못다해준 아쉬움에 남모를 한숨을 내쉬지는 않을는지. 이제 호리병 속에 가둬 저 멀리 바다로 띄워 보내 끝났다는 「만득이 시리즈」가 다시 「귀신」을 찾아 헤매이는 만득이의 이야기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상의 모든 어버이들이시여. 오늘 하루만이라도 그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당신만을 생각하소서. 김정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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