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泳三(김영삼)대통령이 92년 대선자금을 공개할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한마디로 민심을 외면하는 최악의 선택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헝클어진 정국을 수습하고 땅에 떨어진 지도력을 추슬러 국가의 막힌 전망을 뚫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정말 절박하다면 이런 기대밖의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로써 정국이 다시는 되돌아설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지나 않을지 우려된다.
『국민의 정서는 잘 알고 있으나 속시원하게 밝힐만한 자료가 없어 안타깝고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이 김대통령의 92년 대선자금에 관한 입장표명의 전부다. 그것도 청와대에서 李會昌(이회창) 신한국당대표의 주례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간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를 두고 국민의 정서를 잘 알고 있는 대통령의 언급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국민의 정서와 대통령의 정서는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대통령의 생각이 국민의 뜻과 동떨어져 있다면 난국은 수습되지 않는다.
김대통령이 대선자금 공개를 꺼리는 속사정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공개하면 자칫 대통령직 유지가 「위법 상태」의 지속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셈이 되고 난국을 수습한다는 것이 오히려 또 다른 불씨를 제공해 대통령 하야까지 각오하지 않을 수 없는 헌정중단의 파국을 부채질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여권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는 민심을 크게 잘못 읽은 오판이자 국민의 정치수준을 얕잡아본 착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기대 저버린 입장 표명 ▼
청와대와 여당의 희망대로 대통령의 짤막한 언급으로 대선자금 의혹이 덮이고 이로써 여야가 합심해서 경제 살리기 등에 나서는 국면전환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가 못하다. 야당이 대통령 하야를 공식적으로 처음 거론하고 나서는 등 여권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길로 치닫고 있다.
국민이 걱정한 것은 바로 이러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대통령이 국민 앞에 직접 나서서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으로 난국은 일단 수습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관측이었다. 대통령과 여권이 이런 정서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은 아직도 무엇엔가 연연하는 사심(私心)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파국을 두려워 하는 것은 대통령이나 여야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국민이다. 국민은 어떻게 세운 나라를 누구때문에 파국으로 몰고가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은 지금이라도 이 국민정서를 헤아려야 한다.
「자료가 없다」는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다. 전모는 다 파악하기 어렵다 해도 최소한 대선 당시 공조직의 자금규모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였다. 기대에는 크게 못미쳐도 이른바 「포괄적 입장표명」 정도는 있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대통령은 이 작은 기대마저 저버렸다. 청와대와 여당은 「헌정중단이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는 말로 대통령의 침묵을 옹호하지만 국민의 기대에 대한 배신보다 더 큰 배신은 없다.
▼ 누구도 파국 원치않아 ▼
이미 92년 당시의 여권 중간급 선거자금 관리자가 최소한 1천억원 이상의 자금사용을 시사한 적도 있다.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 두 전대통령의 비자금도 찾아내 처벌하고 몰수하는 마당에 불과 5년 전 자금사용 내용을 자료가 없어서 밝힐 수 없다는 변명은 아무래도 수긍하기 어렵다. 어떻게든 국민적 의혹을 풀어 보이겠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보이지 않은채 속시원하게 밝힐만한 자료가 없어서 못밝히겠다고 하는 것은 위기를 버티기로 넘기겠다는 발뺌으로밖에 달리 보기 어렵다.
여권은 더 이상 과거문제에 매달리기보다 재발방지에 지혜를 모으는 것이 현명하다고 설득하고 있다. 심지어 여당 대표는 예상되는 야당의 반발에 대해 『정국은 항상 시끄럽게 마련』이라며 앞으로 검찰수사에서 대선자금 문제가 드러나도 정치권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오만한 반응을 보였다. 대통령과 여당의 시국인식이 이런 수준이라면 앞으로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보장할 수 없는 위중한 상황이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또 대통령의 퇴임 후가 무사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정쟁(政爭) 때문에 나라가 결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말 과거와 단절하려면 먼저 과거를 깨끗이 정리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대통령은 시국과 민심을 바로 보아야 한다. 「왜 하필 나냐」고 말할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나라의 얼굴이다. 대통령이 자신에 관한 의혹의 사슬을 스스로 푸는 결단으로 지도력을 되찾을 때 나라가 표류를 멈춘다는 점을 깨닫기 바란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92년 대선자금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진솔하게 다 밝히고, 국민앞에 사과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난국은 풀리기 어렵다. 그런 고해(告解)를 끝으로 과거를 털고, 속죄하는 심정에서 경제와 안보, 돈 적게 드는 정치, 공정한 대선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자고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 그것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바른 선택이다.
답답한 것은, 파국으로 가기를 원치 않는 한, 대통령이 더 이상의 입장표명을 하지 않는다 해도 이를 되돌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은 대통령을 영원히 「원죄」에 묶어둘 것이다. 그것은 대통령 자신이나 국가를 위해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