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시인 최영미 「…유럽일기」 펴내

  • 입력 1997년 5월 27일 08시 33분


언젠가는 캔버스에 물감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는 시인 최영미씨(36). 그가 책을 냈다. 『일기도 기행문도 아니고 미술평론이라고 할 수도 없으면서 그 모두이고 그 이상인 책』(이인호 핀란드대사) 「시대의 우울―최영미의 유럽일기」(창작과비평사).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후 줄곧 방구석에서 죽치고, 놀면서 인세를 축내온 그를 유럽여행으로 이끈 것은 화가 렘브란트였다. 그는 우연히 들른 한 서점의 책더미에서 하나의 눈빛이 자기에게로 왔고 그순간 내부에서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표지그림인 「켄우드의 자화상」, 그 인상적인 눈빛에 사로잡힌 것. 『임파스토(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유화기법), 키아로스쿠로(강렬한 명암대비)의 대가 등등, 온갖 잡다한 미술사적 지식으로 무장한 나를 단숨에 무장해제시켰던 눈.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지평선 저 너머를 이미 보아버린 사람의 눈』 그는 『나는 시 쓰는 기계가 아니다』고 내뱉지만 그의 미술감상은 시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 그의 시만큼이나 솔직하고 당돌하다. 언뜻 언뜻 「내가 연애시를 써도 모를거야/사람들은, 그가 누군지/한 놈인지 두 놈인지…」라고 내지르는 「성깔」이 느껴진다. 적어도 눙치는 이론이나 어물쩍 건너뛰는 법은 없다. 『내가 아는 만큼, 느끼는 만큼, 그만큼만 썼어요. 분석과 설명이 감성을 앞지르지 않도록 그 많은 책과 자료를 잊고 그 많은 이야기들을 지우고 작품을 직접 만나려고 했어요』 그런데도 군데군데 그의 「가방끈」이 느껴지기도 한다.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나와 홍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이력 같은 것이…. 쿠르베의 「바닷가」 앞에 선 그는 파란 하늘에 성에 낀 듯 희뿌옇게 엉킨 구름, 그리고 그 위에 살짝 암시된 검은 먹구름에서 화가의 흐린 속내를 읽어낸다. 그리고는 「잽싸게」, 그림이 그려진 때와 파리코뮌 이후 화가의 불우한 시절을 맞춰본다. 그리고는 그림의 제작연대와 시인의 직관이 「어긋났음」을 솔직히 실망한다. 그는 또 브뤼겔의 「이카로스의 추락」에서 바다에 빠져 발버둥치는 이카로스의 발과 그 옆에서 눈하나 깜박하지 않는 낚시꾼 사이의 절망적인 거리를 헤아린다. 그리고는 「그 끔찍한 리얼리티를, 도저한 허무를 이처럼 딴청 피우듯 유유자적 표현한 화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라고 묻고 있다. 물론 그가 여행에서 미술품만을 본 것은 아니다. 런던의 지하철을 타고 데드마스크처럼 굳어있는 그들의 표정에, 「노쇠한 문명의 끝자락에서 나온 무기력」을 덧칠하기도 하고…새벽녘 호텔 창가에서 실비아 플라스의 시가 씌어졌던 「그 영원에 가까운 푸른 새벽」에 잠시 취해 보기도 한다. 그는 오는 31일 책이 출간되면 훌쩍 다시 유럽으로 떠날 계획이다. 『나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지만 책이 나온뒤 그 「들볶임」이 정말 싫어요. 또 다른 이유도 있어요. 내가 정말 무엇을 썼나 다시 확인하고 싶기도 해요. 내가 보고 쓴 것이 설마 「사기친」 것은 아니었는지…』 〈이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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