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 입력 1997년 5월 27일 08시 33분


(김소진 지음/강/7천원) 소비와 욕망이 키워드가 된 90년대 한국사회. 물정없이 흥청거리는 「특별시」 서울에 살면서도 작가의 시선은 초라한 것들에 닿아있다. 유년의 기억을 간직한 미아리 산동네(「눈사람속의 검은 항아리」) 단칸방살림의 서민들에게는 목욕탕과 거실 노릇까지 했던 옹색한 부엌(「부엌」)…. 소설의 무대만이 아니다. 김지하의 「황톳길」을 읽고 시인이 되었지만 지금은 아내의 셔터맨 노릇으로 세월을 죽이는 약국집 사내(「지붕위의 남자」), 잘나가는 외환딜러로 회사에 충성을 바치다 하루아침에 명예퇴직 대상이 된 최대리(「내 마음의 세렌게티」)등 고단한 삶을 미욱하리만큼 껴안고 있는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소설을 이끌어나간다. 소설의 무대와 주인공의 행색, 그리고 「가두시위에 자신없어 글쓰기를 택했다」는 작가의 80년대 이력을 들어 작품을 섣불리 「운동권」으로 분류하는 것은 오해다. 저자는 「약한 자는 착하고 강한 자는 악하다」는 이분법구도를 멀찌감치 벗어나 약한 자 속에 깃든 약삭빠름이나 비굴, 강한 자 속에 깃든 허기까지 가감없이 그려낸다. 그러나 상처투성이의 불완전한 삶들을 창조하면서도 작가는 결코 비관하지 않는다. 동학군의 손자이자 일제 밀정의 아들이고 스스로는 해병대 전우회원으로 뒤죽박죽의 내력을 지닌 「신풍근 배커리 약사(略史)」의 주인공 찐빵집 할아버지. 그가 「한총련 데모꾼」 손자와 산동네의 불빛을 바라보며 나누는 이야기는 작가가 세상에 던지고 싶은 화두인지도 모른다. 『저 혼자 고립된 불빛들이란 세상에 하나도 없단다. 있을 수가 없어』 〈정은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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