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비밀외교전문이 공개되려면 30년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13일자 워싱턴 포스트지 기사는 한미 양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불과 2년전인 95년10월 한미간의 밀약을 담은 양국간의 비밀외교전문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 고위관리가 의도를 갖고 흘리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외무부는 비밀전문 유출에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며 비공식적으로 미국에 유감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리가 있는 대응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에 대한 것이며 국민에게는 따로 해명해야 할 보다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당시 외무부 미주국장이던 임성준(任晟準)이집트대사는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이 매우 어려운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미국이 총선(96년4월) 전에 평양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할 경우 보수세력에 공격당할 빌미를 제공할지 모른다』면서 연락사무소 개설연기를 요청했다.
이것은 집권여당의 총선승리를 위해 외교정책을 왜곡한 명백한 증거다.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유종하(柳宗夏)외무장관. 임대사가 윗선에서 어떤 지시를 받고 이같은 요청을 했는지, 외교정책의 정치적 왜곡을 막기 위해 밝혀야 할 대목이다.
미국 역시 당시 국무부 동아태담당 부차관보 토머스 허바드가 『연락사무소를 개설할 때는 한국의 국내 정치적 여건을 감안하겠다』고 비밀리에 약속함으로써 한국정치에 중립이라는 미국의 공식적 표명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 집권여당의 정치적 필요를 인정함으로써 사실상 선거에 개입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도 개입성향을 드러냈다.
이번 대선에서는 미 관리들이 집권여당의 강경한 대북노선 때문에 4자회담이 잘 안된다고 지적하면서 정권교체를 열망한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4자회담의 지체가 과연 한국의 집권여당때문인지 묻고 싶다.
비밀전문을 유출한 고위관리의 의도도 이제는 한국의 집권여당과 결별하겠다는 신호를 보내려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미국이 한국민의 자유의사에 따른 정부구성을 존중한다면 정부여당과 헤어지든 다시 만나든 간에 무엇보다 한국 정치에 대한 불개입 원칙부터 지켜야 한다.
홍은택<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