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구 지음/돌베게 펴냄>
이젠 머리가 하얗게 센 고희(古稀)의 나이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세계적인 수학자. 그리고 영어(囹圄)생활….
그런 그를, 아픈 배를 쓰다듬어 주며 읊던 그 옛날 할머니의 노랫가락은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할매 소온은 약손이고 재구 배는 또옹배고, 할매 소온은 편작(扁鵲)손이고 재구 배는 무쇠배고」.
발끝에 채이던 작은 돌멩이 하나까지도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던 시절.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 세상은 어릴 적 놀던 마당보다 어쩌면 더 좁은 곳일수도 있다.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안재구 지음·돌베개)은 저자가 딸에게 들려주는 지난시절 유년의 꿈과 시련의 조각들.
밀양 한 시골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속, 그리고 일제치하라는 민족적 고난의 시기를 꿋꿋하게 지켜낸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저자의 잔잔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입 하나 덜기위해 어린 딸을 남의 집살이 보내는 것이 흔할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하고 배 고프던 시절. 휘청거리던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도 푸른 보리이삭처럼 자라나는 동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논물에서 민물새우와 미꾸라지를 잡고 밤서리 쥐불놓이 등으로 일년 사철 자연속에서 뛰노는 철부지 아이들.
「껑 껑 꾹꾸르르르……」라는 소리를 내며 얼어붙었다는 당시 동짓날 남천강의 맑디 맑은 강물처럼 투명하기만 하다.
열발뛰기 고누두기 등의 민속놀이, 처녀 총각이 만나는 달맞이, 그리고 고향의 산과 들에 전해오는 전설과 설화들도 눈감으면 잡힐듯 선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그의 유년은 봄날처럼 따사롭지만은 않았다.
그속엔 창씨개명강요 등 일제의 갖가지 위협에 당당하고 지혜롭게 대항하던 할아버지와 순수하면서도 차돌처럼 단단했던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초등학교 입학면접장에서 일본인 교사로부터 「소가 어떻게 우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모오∼」라는 일본소의 울음소리 대신 「움머∼」라고 대답하는 소년.
그는 학교문을 나서며 큰소리로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이라고.
입학후에도 조선어를 쓰지말라는 일본인 교사에게 반항하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들도록 맞지만 그 기백은 오히려 일본교사를 움츠러들게 한다.
94년 국보법위반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저자. 평탄치만 않은 인생역정이다.
풀려날 기약이 없는 그에게 지난 시절은 엄동설한을 녹이는 봄햇살같은 넉넉함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모진 현실의 고난을 이겨낼수 있는 한줄기 희망을 추억에서 찾으려는 듯하다.
`〈한정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