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나를 시인이라고 불렀다. 내가 시를 쓴 것은 중고교 시절 백일장 때나 작문숙제를 위해서가 고작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시를 써서 쌀을 사고 책을 사보는 시인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애가 나를 시인이라 부른 것은 내게서 이따금 시인의 정신을 엿보았기 때문일까. 우리는 누구나 시를 쓰듯 꿈을 꾸듯 살아가니까 말이다.
결혼 이후 우리집 장롱 속엔 나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한 남편의 물건 하나가 있었다. 누렇게 바랜 신문지에 싸인 그 액자는 대청소 때나 한번씩 새 신문지로 바꿔 포장되곤 했다. 그것은 무슨 표창장처럼 생긴 이용사면허증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 남편은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그 중 하나가 이발사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도 있었으련만 나는 왠지 실감할 수 없었다. 되레 소용도 없는 걸 보관하느라 공연히 사람만 귀찮게 한다고 여겼다.
일이 여의치 않자 어느날 남편은 이발관에 취직했다. 그때부터 남편의 목표는 돈을 모아 자신의 이용사면허증을 떡하니 걸어놓은 이발관을 차리는 것이었다. 몇해가 지나 우리는 꿈에 그리던 이발관을 차렸다.
원치는 않았지만 나는 남편으로부터 면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편은 내게 엄격히 수업을 시켰다. 진정한 이발사로 탄생하기 위해 그 옛날 자신이 그랬듯이. 바닥의 머리카락 청소며 증기수건 세탁이나 앞장(이발할 때 손님이 두르는 휘장) 털어주기부터 시켰다. 나중에야 면도칼로 내 종아리와 팔의 솜털을 문지르게 했다. 그런 다음 남편의 얼굴이 나의 면도실습 대상이 되었고 모든 과정을 거쳐 나는 비로소 면도사로 태어났다.
남편이 이발을 하는 동안 다른 손님이 들어온다. 나는 손님의 면도를 한다. 남자의 수염이 파란 자국을 남기며 내 칼끝에서 삭삭 밀려난다. 나는 성취감을 느낀다. 남편의 모습을 힐끔 훔쳐본다. 가위를 움직이는 그의 날렵한 손끝과 일에 몰두하는 옆모습에서 장인정신을 엿보게 된다.남편이 켜둔 카세트에서 옛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러면 나는 삶의 새로운 기쁨마저 느낀다. 누군가가 묻는다. 『요즘 어때』 하고. 나는 조금 높고 낭랑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아주 좋아』
진영희 (서울 구로구 구로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