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최병선/책임정치는 어디에…

  • 입력 1997년 11월 16일 20시 27분


정치 후진국일수록 유난히 개혁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런 나라의 개혁은 곧잘 개악(改惡)이 되고, 개악은 또다른 개혁을 부르기 때문에 개혁의 환상과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정치 후진국은 민주적 개혁의 역설의 현장이다. ▼ 후진국형 「개혁박람회」 ▼ 국민의 뜻을 물어 민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자니 이도 저도 아닌 개혁이 되고, 급격한 개혁안을 밀어붙이자니 개혁의 민주적 정당성이 위태롭게 되는 까닭이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보통 후자의 길로 가지만 거기에는 졸속 개혁의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정당성 확보수단인 동시에 정책 실패의 최소화 수단이기도 한 민주적 의견수렴 절차를 생략한 개혁은 더 큰 부작용을 낳고 제물에 붕괴하고 만다. 그간 수없이 개혁이 반복되었으나 교육 문제는 악화되고 현정부가 개혁 중 개혁으로 내세운 금융실명제마저 실명(失名)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이 좋은 예다. 국민들의 합리적 무지도 개악을 조장한다. 자기의 의사표현이나 투표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개혁안을 꼼꼼히 뜯어보지 않는 합리적 무지가 결국 의사결정권과 정보를 쥔 자의 전횡과 독주를 방조한다. 우리는 지금 이 두가지 정치 후진국적 상황이 연출해내는 「개혁 박람회」를 구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각제 개헌문제가 기이한 방식으로 제기되어 있는가 하면 아직도 이합집산의 게임이 끝나지 않아 공식 정강정책으로 보기 어려운 설익은 공약이 대선후보의 입에서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선을 핑계로 한달이나 회기를 줄인 국회는 공전을 면하기도 바쁜 마당에 어인 일인지 선진국에서는 당연히 여기는 영장실질심사제의 알맹이를 빼내기로 작정한 듯하고, 의료개혁위원회도 반대한 의료보험 통합 문제를 의원입법으로 강행 처리하려 하는가 하면, 전자주민카드에는 정작 넣어야 할 사항은 빼고 뺄 것은 넣은 안을 통과시켜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경제계가 목말라 하는 금융개혁법안들은 금융개혁의 본질과는 사실상 무관한 감독권한 소속 문제로 날을 지새고, 정부 예산의 비계살을 도려내야 할 국회의원들이 선거만을 의식해 가뜩이나 어려운 마당에 국민의 세부담을 늘리는 중이란다. ▼ 치졸해진 선거판 ▼ 도대체 이 나라에 책임정치는 있는가, 없는가. 집권여당이 증발해버린 희한한 나라, 내일까지 남아 있으리란 보장이 없는 정당만을 가진 이 나라 국민들은 도대체 누구를 상대로 정치적 책임을 추궁해야 하는가. 아니면 민주화의 역설에 비추어 다행이라고 자위라도 할까. 아찔아찔한 「사고철(事故鐵)」 소식을 들었으면 이제 비방과 흑색선전 일색의 치졸한 선거판에서 아예 눈을 뗄 때다. 합리적 무지에서 벗어나 섣부른 개혁안에 현혹되지 말 때다. 책임정치는 약속과 책임을 생명으로 여기는 참된 정치인을 뽑는 국민의 손에 있다. 최병선<서울대교수·정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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