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밟고 한양천리」<한동우 지음/삶과꿈 펴냄>
한국의 수재(秀才)들이 피하지 못하는 중병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출세병」. 웬만큼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들은 일류대학으로 몰리고 대학 인근 고시원은 사시사철 만원이다.
재무부 국고국장, 동양증권 사장, 한솔종합금융 사장을 지낸 한동우씨(62)의 「비석밟고 한양천리」(삶과 꿈 펴냄).
그는 소설의 형식을 빌려 정치인 관료 군인 등 한국 사회를 장악해온 권력자들의 유형을 희화적으로 꼬집는다.
『주인공들은 내가 지난날 재무부 대기업 금융회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무하며 만났던 인물들을 모델로 한 것입니다』
「용군」(龍君) 「비군」(飛君) 「어군」(御君) 「천군」(川君) 「가군」(歌君) 등으로 이름 붙여진 등장 인물들. 이들의 일생사는 70년대 근대화 과정에 뿌리를 둔 한국사회의 구조적 병폐와 맞물려 돌아간다.
이중 고시출신으로 장관의 지위까지 오르는 「용군」은 탁월한 수완으로 아랫사람과 윗사람을 자기사람으로 만들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대가성」있는 금품을 받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한때 사회정의의 깃발을 들었던 언론인 「가군」도 결국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진흙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의 변신을 통해 비판세력이 체제내화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저자 한씨는 그 역시 출세가도를 달려온 한 사람으로서 과거에 대한 참회의 심정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능력있고 수완좋은 사람들이 벌이는 부정부패 놀음이 없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봉건 특권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특권의 철폐로부터 진정한 근대화가 시작됩니다』
〈한정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