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엽편소설집 「껄껄」

  • 입력 1997년 12월 18일 08시 58분


▼엽편소설집 「껄껄」 <이외수-하창수 공저>

<영원히 죽지 않는 뱀 두마리가 있었습니다. 한마리는 눈처럼 희디흰 백사였고 한마리는 밤처럼 검디검은 흑사였습니다. 영원히 죽지않는 뱀 두마리는 색깔만 달랐지 모든 것이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두마리의 뱀은 만나면 상대편을 잡아먹도록 숙명지어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두마리의 뱀은 서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대편의 꼬리부터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습니다. 잠시후 뱀들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뱃속에 서로 한마리씩 간직하고 있으니 뱀은 네마리입니까. 아니면 서로 먹어치웠으니 한마리도 없습니까?>

이외수가 대답했습니다. 껄껄….

가서원에서 펴낸 「껄껄」. 소설가 이외수씨와 그가 아끼는 후배작가 하창수씨가 각각 쓴 시와 소설이 한권의 책으로 묶여졌다. 선시(禪詩)가 있는 엽편소설집이라고나 할까.

「껄껄」은 깨달음의 문턱에 한 발을 올려놓은 자의,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의 얼음장이 깨지면서 나는 소리다. 아니면, 그 깨달음의 문턱에서 획, 몸을 돌리며 한바탕 흐드러지게 터뜨리는 웃음소리라고나 할까.

계절이 바뀌는 산사(山寺)에서, 언뜻언뜻 눈에 밟히는 삶과 문학의 화두(화두)를 지팡이 삼아 서로 눈을 맞추며 써내려간 글들. 바람결에 귓전을 스치는 풍경소리처럼 은은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무결선생」을 보자.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박광철 선생.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해서 무결선생이다. 겸손한 성품. 학생들에겐 언제나 헌신적이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무결선생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

박선생은 한사코 의자에 앉으려들질 않았다. 수업시간은 물론이고 교무실에서도 서서 지낸다. 어쩔 수 없이 앉아 있어야 할 때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고통을 참는 표정이 역력하다.

보다 못한 동료교사가 충고했다. 『내가 잘 아는 치질선생이 있어요…』 『저, 치질이 아니에요』

진짜로 치질이 아니었건만 그의 별명은 무결선생에서 치질선생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의자에 앉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날, 가구회사를 하는 학부형으로부터 기막힌 의자 하나를 선물받았다. 엉덩이가 닿는 부분을 동그랗게 오려내 버린, 가운데가 뻥 뚫린 의자.

그 의자를 보고 박선생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중얼거렸다. 『저는 의자에 앉을 수가 없어요. 제가 가르쳤던 제자 하나가 지금 감옥에 가 있는데…. 전 잘못 가르친 죄로 지금 그놈과 함께 벌을 받고 있는 거라구요』

짧은 소설은 가벼운 콩트로 흐르지 않는다.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해진 마음을 따뜻한 털실로 감싸안듯 품는다.

지나간 시절 한번쯤은 만나 뵌 적이 있는 그리운 스승 「무결선생」. 그에게 바치는 이외수의 시.

「싸리나무 회초리가 맵기 때문에

싸리꽃이 그토록 눈부십니다…」.

도심의 쓰레기통 한편에서 피어나는 꽃 한송이엔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알까/오래전에 썩어서 바스라진 고목 하나/천년풍상에 저민 살을 헐어/시방 네가 뿌리내린 땅이 된 줄을」.

이씨의 시는 말하자면 털실을 짜는 마음, 그 심지를 돋우는 연민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평범한 소시민의 눈물 한방울도 그냥 스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 어느 명의가/집도를 해서/그대 가슴 투명한 눈물의/진신사리를 보여주리…」.

72년 데뷔한 이래, 줄곧 문단과 세상에 벽을 쌓고 지내온 이씨. 그런 그에게 우리 시대는 이런 시를 강요하기도 했다.

「청문회가 끝나고 나면/어째서/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오리발만 남겨둔 채/오리무중이고/오직 관객들만이/죄인이 되어/고개를 깊이 떨군 모습으로/혼탁한/역사의 강물을 건너야 하는가…」.

〈이기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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