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당대의 세도가에게만 몰렸을 때 칠삭둥이 한명회(韓明澮)는 요샛말로 ‘별볼일’없던 수양대군 집에 들락거렸다. 세상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명회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사극을 통해 전해진다. 권문세가에 가면 댓돌에 신발이 너무 많아 내 신발을 찾을 수 없지만 수양대군 집에 가면 신발이 별로 없어 내 신발을 쉽게 찾기 때문이라고. 나중에 수양대군은 세조가 되고 한명회는 세조의 오른팔로 득세한다
▼그동안 정초마다 힘있는 정치인 집에는 세배객이 넘치고 힘없는 정치인 집은 썰렁했다. 야당에서는 당수와 계파보스 집에나 손님이 몰렸으나 여당은 당3역과 국회 상임위원장을 비롯, 웬만한 간부 집도 초만원이었다. 그런 집에서는 세배객들이 남의 신발을 밟고 들어가거나 신발을 바꿔 신고 나오는 일이 흔히 벌어졌다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처음 맞은 올해 신년연휴에는 풍경이 달라졌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당3역 집에까지 내방객이 넘쳤으나 한나라당과 국민신당은 최고간부 몇 사람 집에만 손님이 많았다고 한다. 1년전만 해도 세배객으로 집안이 시끌벅적했던 한나라당의 일부 간부는 경제사정도 고려해 집을 아예 비우고 세배를 받지 않았다. 당사 단배식도 여야 역전(逆轉)을 반영하듯 상차림이 달랐다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은 작년말 경제 5단체장에게 “야당도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며 정치자금을 법에 따라 여야에 나눠주도록 당부했다. 돈뿐만이 아니다. ‘신발’도 여야에 분배돼야 한다. 한 해의 노고를 위로하고 새해를 축복하는 일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어려운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 더욱 값지다. 한명회처럼 훗날의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해야 정치와 사회의 성숙과 인간화가 앞당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