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형석/수능시험을 폐지하자

  • 입력 1998년 1월 2일 20시 40분


지금 우리는 경제위기를 걱정하고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정치적 후진성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 정치인들의 자질 빈곤은 쉽사리 고쳐질 것같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민족의 먼 앞날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국민교육, 특히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의 잘못된 방향을 생각할 때마다 우려와 답답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어진다. 교육부와 교육 담당자들은 배 안에서 물건을 정리하며 대단치 않은 고장을 고치는 데 열중하고 있을 뿐, 배의 방향이 잘못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 일차적 책임은 교육을 모르는 군사정권 때 중고등학교의 평준화를 강요한 데서 비롯되었고 더 큰 과오는 대학 입학시험을 정부에서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중병의 증상으로 나타나 오늘에 이르렀다.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의 생명은 학생들의 타고난 소질과 개성을 계발 육성해 다원화해 가는 사회에 적응하면서 다양성을 개척해 나가도록 이끌어 주는 데 있다. 그리고 적어도 소수의 일류대학에서는 청소년기의 왕성한 기억력과 청년기의 폭넓은 이해력을 활용케 하고 지속적인 사고력과 특출한 학생들의 창조력까지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앞으로의 세계는 어느 민족이 창조적 소수를 계속 확보 유지하는가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되도록 되어 있다. 우리도 곧 일본 중국과 더불어 창조력 경쟁에 들어서게 될 것이며 그 가능성은 일류대학들에 주어진 지상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같은 관치(官治)교육과 교육의 폭넓은 생명력을 입시국가로 만드는 현상이 계속된다면 민족의 장래가 너무나 암담해질 것이다. 창조력을 갖춘 지도층이 사라지며, 민족의 우수성을 통제적인 교육이 병들게 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 일본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들과 후보들이 도쿄(東京)대에서 배출되고 있다. 그런데 서울대 출신 중에서는 작가다운 작가가 나온 바가 거의 없을 정도다. 서울대의 교수가 직접 “우리 대학은 고시학원”이라고 자학적인 평을 내리고 있을 정도다. 사학과 학생도, 농학과 학생도 모두가 고시 준비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지적 평가의 획일성이 인성(人性)교육을 망치고 있으며 건설적인 가치관과 도의정신을 외면하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교육부가 교육을 행정의 틀에 맞추려는 통제적 교육에서 손을 떼야 하며 조속한 시일 안에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정부 관장 하의 수능시험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본다. 80만명을 성적순으로 평가하며 전 국민을 입시지옥으로 몰아넣는 과오는 시정되어야 한다. 그 일에 매달리다 보면 더 잘되리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나 잘못된 방향 설정은 교육을 파국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이제라도 수능시험제도를 폐지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면 앞으로 다가올 전국민적인 교육의 병폐를 시정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당국자들은 입시의 공정성을 우려한다. 학업성적의 척도에 학생들의 개성과 장래를 맞추어 가려는 사고 자체가 비교육적인 것이다. 봉사점수를 준다는 반도덕(反道德)적인 결과가 그 부수현상이다. 모든 입시는 대학 자율에 맡기고 대학은 학생들의 개성과 사고력 및 창조력을 발휘하도록 뒷받침해야 한다. 공정성이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제각기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과감한 선택이 있기를 바란다. 김형석<연세대 철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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