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자! 눈꽃나라 한라산으로

  • 입력 1998년 1월 7일 20시 03분


이 겨울, 눈 내린 한라산에 선다. 산 아래서 골짜기 골짜기를 거슬러 휘감고 불어오는 겨울바람. 그 바람을 앙상한 나뭇가지에 켜켜이 실어 하얀 눈 세상을 만들어 놓은 한라산, 이 곳은 인간의 땅인가, 신들의 나라인가…. 어지럽다. 겨울 한라를 제대로 보려면 영실쪽에서 방향을 잡아 어리목쪽으로 내려오는 게 좋다. 언제쯤이나 눈 세상을 만날까, 행여 ‘기다림’이 들킬세라 조심조심 중턱으로 오르면 갑자기 은백색 눈 세상이 펼쳐진다. 아! 시련조차 달게 받으면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빚어낼 수 있는가. 거친 눈바람을 마다않고 고이 받아들인 후 찬란한 눈꽃으로 승화시킨 구상나무숲을 보면 갑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질보다 양, 내용보다 형식, 정신보다 물질, ‘어떻게’보다 ‘무엇’에 매달려 살면서 들킬세라 겹겹이 몸을 감쌌던 겉멋들이 한꺼번에 맥 없이 벗겨지는 기분,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린 지난 날들. 경제규모 세계 11등, 오직 남보다 좋은 옷과 집과 차를갖기 위해 일등 일등만을 생각하며 질주했건만 어이하여 벼랑끝인가. 가파른 낭떠러지에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오백나한 무리’를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걷어올린다. 남한 땅에서 제일 높은 1천9백50m. 산행으로 목이 칼칼할 즈음 윗세오름(1,714m) 기슭 노루샘물을 들이켠다. 윗세오름을 왼쪽으로 끼고 돌면 빨간 슬레이트지붕을 얹은 대피소가 나온다. 각종 음료수와 과자를 파는데 여기서 먹는 컵라면 맛이 또 기막히다.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을 아버지산이라 한다면 한라산은 어머니산. 초행자라도 등산화만 있으면 이 겨울 한라산을 쉬엄쉬엄 한발한발씩 오를 수 있다. 어머니품으로 안기는 듯 그 가이없는 열림 겸손함 받아들임…. 서리서리 눈숲이 된 한라산을 오르며 우리 모두 깊은 참회를 해보자. 시련조차 참다운 아름다움으로 빚어내는 대자연의 손길을 확인하면서 교만이 부른 오늘의 이 모든 고통을 뼈속 깊이 받아들일 준비를 하자. 그러면 한결, 힘이 생긴다. 훨씬 가벼워진다. 〈제주〓허문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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