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초의 마술사’라면 누구를 떠올릴 수 있을까. 1백분의 1초, 심지어 1천분의 1초차로 승부를 가르는 봅슬레이 선수나 우주선끼리의 도킹을 시도하는 우주물리학자 정도다. 그러나 0.01초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즉각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는 또 다른 승부사가 있다. 바로 외환딜러다. 환율이 가파르게 요동하는 외환시장에서 하루 24시간을 초단위로 쪼개쓰며 총성없는 전쟁을 치른다.
▼딜러는 그야말로 프로페셔널한 전사여야 한다. 환율을 둘러싸고 긴박하게 돌아가는 자금흐름, 환율의 변동요인인 각종 경제지표와 국제정치적 상황까지를 면밀히 검토하며 순간 순간 피말리는 전투를 치른다. 미국의 다우존스, 일본의 닛케이, 홍콩의 항셍지수의 등락은 물론 세계 유수의 통신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국제금융시장 동향도 놓쳐서는 안된다.
▼한국의 외환위기가 감지된 것은 작년 초였다. 우선 민간연구소가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동남아 외환태풍이 거세게 북상하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잇따라 쓰러지면서 위기감이 고조됐으나 재정경제원은 이를 계속 묵살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작년 10월말 외환의 심각성을 깨닫고 강경식(姜慶植)경제팀 3인방이 대책회의까지 가졌으면서도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급박한 외환사정을 알게 된 것은 11월10일경이라고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불과 열흘 전이다. 그것도 재경원이 아닌 한 금융전문가로부터 전해 듣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다니 한심할 따름이다. 초읽기로 대처했어야 할 외환위기를 방치함으로써 국가경제를 이꼴로 만든 자들은 누구인가. 진상을 밝혀내고 엄정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김용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