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배인준/근로자 自救를 위하여

  • 입력 1998년 1월 8일 20시 42분


몇개 제조업체의 노사관계를 들여다 보았다. A사는 ‘오토(Auto) 반장제’라는 걸 실시하고 있다. 생산직 근로자가 근속 12년이 되면 무조건 반장으로 승진하는 제도. 노사간 단체협약이 그렇게 돼 있다. 회사측이 능력과 실적을 따져 인사권을 행사할 여지가 없다. 이 회사는 노동조합의 동의 없이는 종업원을 타지역 사업장으로 전근시킬 수 없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노조의 반대로 무산됐다. B사는 지난해 본업과 직접 관계가 없는 제품반출 지원업무를 독립시킬 계획을 세웠다. 기존 인원과 장비를 넘겨 독립시키되 일거리는 보장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사자들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사내 식당을 외부 전문업체에 위탁경영시키기 위한 계획도 추진했으나 역시 백지화했다. 노조가 반대했기 때문이다. 왜 반대했나. 노조측은 “조합원들의 고용이 불안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회사측은 “노조가 조합원 감소로 힘이 약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C사는 해외 현장에 나가 있는 기능직 사원들에게 월 1백70∼2백시간의 시간외 수당을 인정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부장이나 이사급인 현장소장보다 기능직 사원의 급여가 많다. 이 회사 종업원의 연평균 임금은 4천5백만원이라고 회사측은 말했다. 요즘 환율로는 3만달러 이하이지만 1년전 환율로는 5만3천달러 정도. 같은 업종에서 세계 최대인 미국 회사의 1인당 연평균 임금은 4만여달러다. D사는 종업원 개개인과 각 작업반의 생산성 향상을 자극하기 위해 ‘생산회의’라는 회의제도를 운용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지난해 없어졌다. 노조측이 “개인별 과당경쟁과 반별 생산성 비교로 근로 환경이 나빠진다”며 반대했기 때문. 일본의 중견기업에서 기술 연수를 한 적이 있는 국내 중소기업의 한 근로자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처음 일본 회사의 작업라인에 투입됐을 때 정말 놀랐다. 종업원들은 작업 시간을 칼날 같이 지키고, 일하는 중에는 옆도 돌아보지 않고 열중했다. 이 사람들은 숨도 쉬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그들 흉내를 내려니 며칠간은 몸이 꼬여 견디기 힘들었다. 나중에는 오기가 생겼다. 2개월간의 현장 연수를 마칠 무렵엔 그들이 ‘한국 사람 대단하다’며 거꾸로 칭찬을 해주었다. 우리 회사에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일본에서처럼 일해보려고 했다. 그랬더니 옆에서들 ‘일본 사람 다 됐군’‘연수 두번 갔으면 혼자서 우리 공장 일 다 하겠네’‘혼자 일본식으로 잘 해봐’ 하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결국 나도 옛날로 되돌아갔다.” 정리해고의 공포가 근로자들을 덮치고 있다. 실업을 면하더라도 임금은 동결 아니면 삭감이다. 물가는 정신 못차리게 오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국제통화기금(IMF)은 누가 불러들였는가. 신문은, 그리고 필자 개인도 정부와 정치와 재벌의 책임을 누누이 따졌다. 그런데 뭣 때문에 근로자의 문제를 늘어 놓는가. 땀흘려 일해온 대다수 근로자들에게까지 경제위기의 책임을 돌리려는 의도인가. 절대다수 근로자의 자구(自救)를 위해 근로자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려 보고 싶었을 뿐이다. 기업의 경영 개선과 생산성 향상 및 경쟁력 회복, 그리고 노사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 근로자가 해야 할 몫을 생각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이 기회에 정치인들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다. 지금에 와서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은 뻔뻔스럽다. 진작에 노동법을 고칠 때 정략(政略) 당략(黨略)의 구태를 버렸어야 했다. ‘근로자 참여 및 노사 협력 증진’을 내세워 생산성 향상을 위한 제도 개선까지도 회사측이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없도록 묶어놓은 무감각이 안타깝다. 배인준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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