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외환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소재를 묻는다면 은행장들도 떳떳할 수가 없을 것이다.
국가부도 위기의 원인을 짚다 보면 은행의 잘못된 행태가 공범(共犯)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수출이 좋아지고 있는데 은행들이 돈을 풀지않아 위기극복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 금융기관은 너무 소극적이고 보신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은 9일 은행장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외환위기 극복을 당부하면서 이렇게 질책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 금융기관은 그동안 관치금융의 폐해를 지적하면서도 정부와 정치권의 보호막을 즐기면서 ‘땅짚고 헤엄치기식’의 돈장사를 해왔다.
그런데 외환위기의 먹구름이 드리워지면서 우리 은행의 경쟁력이 낱낱이 드러나게 됐다. 마구잡이 대출, 형편없는 기업분석능력, 분별없는 해외투자, 방만한 내부경영….
은행들도 할 말은 있다. 경제개발시대부터 산업자본의 돈줄 역할을 하도록 강요만 했지 은행에 ‘경쟁력을 배양할 기회를 언제 줬느냐’고. ‘금배지’를 들이대며 대출청탁 인사청탁을 한 것은 누구며 ‘특정 기업을 망하게 해서는 안된다’며 부도유예협약을 급조한 게 또 누구냐는 지적이다.
이날 김차기대통령은 몇가지 약속을 했다. 작금의 은행 부실화를 초래한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을 타파하겠다고. 전현직 대통령도 집권초기에는 똑같은 약속을 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이번 약속만은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더 이상 미룰 여유가 없고 자칫하면 국가부도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차기대통령 혼자서 깃발을 높이 쳐든다고 될 일일까. 정경유착의 뿌리는 권부(權府)에 기대고 사는 주변인물들의 탐욕을 먹고 깊어진다. 이들이 모두 특혜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들이 기득권을 포기할 때 비로소 관치금융과 정경유착을 청산할 수 있다.
이강운(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