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외환 및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 소재를 놓고 정부 고위 당국자들 사이에 ‘네탓’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우리 경제의 누적된 병폐가 드디어 곪아터진 것이 지금 사태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경제주체 누구도 “우리는 잘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재벌 기업들의 방만한 경영과 정부의 식견없는 정책 그리고 사회 각 부문의 분수를 넘은 소비행태가 겹치고 쌓여 오늘의 위기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언론도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언론은 경제주체들의 무모한 행태와 그 위험성, 그것이 가져올 파국적 결과에 대해 제대로 경종을 울린 바 없다. 위기 도래의 신호를 감지하지 못한 채 외국 전문가들의 경고와 국제금융기관의 움직임을 전하는 것도 게을리 했다. 오히려 무능한 정책당국과 방만한 대기업의 논리에 휘말려 장밋빛 환상을 전파하는 확성기 역할을 한 측면이 없지 않다. 가히 방종으로 흐르는 듯한 사회 풍조에 편승하여 이를 조장하고 특히 신문의 경우 증면 확장 등 과당 경쟁을 벌여 귀중한 자원과 외화를 낭비해 왔다.
신문들이 뼈아픈 자성과 함께 거듭 태어나는 각오로 언론 본연의 기능을 되살리지 않는다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국민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존립도 위협받는 상황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신문업계의 무절제한 행태는 신문용지 사용량 추세에서 잘 나타난다. 지난해 국내 신문용지 사용량은 총 1백37만여t으로 5년전의 89만t에 비해 54%나 급증했다. 과다한 증면과 무가지 살포 경쟁이 빚은 결과인 것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신문 강매와 경품돌리기가 성행했고 판매 일선에서는 살인사건까지 빚어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과당경쟁은 그치지 않았고 인쇄물량의 상당 분량이 파지공장으로 직행하는 사태를 거듭했다.
특히 일부 신문은 계열 모기업의 막대한 자금지원을 바탕으로 물량공세를 폄으로써 공정경쟁질서를 파괴하고 모기업에 부담을 안겨주는 등 사회적 낭비를 일삼았다.
신문용지 생산을 위해 펄프 고지(古紙) 등 원료를 수입하는데 들어간 외화가 작년 한해 2억여달러에 달했다.
우리는 허풍속에 살아왔다. 지난 88년 이후, 특히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나타난 두드러진 현상은 근검절약과 저축의 기풍이 거의 사라지고 먹고 마시고 쓰고 즐기자는 풍조가 사회에 만연했다는 사실이다.
금융실명제 실시와 함께 금리소득이 불로소득으로 강조되면서 저축은 줄어들고 인건비 상승으로 경쟁력을 잃은 기업들이 속속 해외로 탈출하는데도 정부는 이것을 세계화 진전의 지표인양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방치했다. 이 경박한 사회풍조의 꼭대기에서 신문이 널을 뛰는 무절제한 물량경쟁으로 낭비를 부채질한 것이다.
신문용지 생산을 위해 투입되는 고지의 50%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의 고지 수집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일정한 날짜를 정해 각 가정에서 모아둔 신문을 문밖에 내놓으면 이를 거둬가는 식으로 고지를 수집, 재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데다 각 가정의 협조도 부족해 수집이 잘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자원부국인 선진국이 재활용품을 수출하고 자원빈국인 우리가 이것을 수입해 쓰는 아이러니가 빚어지는 것이다.
신문업계는 경제위기 극복에 동참하기 위해 각사 자율적 판단에 따라 발행면수를 줄이기로 결의한 바 있으며 이에 따라 자율감면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무가지 살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
신문들이 국민경제적 논리를 도외시한 채 이른바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외부자본력까지 동원하여 무절제한 경쟁을 일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견제할만한 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신문도 엄격한 사회적 감시를 받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지금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만이 아니다.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앞두고 언론이 건전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틀을 갖춘다는 측면에서 그 의미를 두어야 한다.
그 첫 단계로 정부기구인 공정거래위원회는 무가지 살포를 규제해 공정한 거래질서를 확립하고 자원의 낭비를 막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시민단체들의 언론감시 활동이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져야 한다. 언론이 스스로의 노력과 사회적 감시를 바탕으로 사회 공기(公器)로서의 제 기능을 다한다면 경제위기 극복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이현락(본사 신문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