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에세이]남재희/「독선과 아집의 역사」

  • 입력 1998년 1월 15일 20시 08분


▼「독선과 아집의 역사」 (바버라 터크먼 지음/자작나무 펴냄)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그 무렵에 나온 미국의 바버라 터크먼여사의 ‘바보행진―트로이에서 월남까지’를 읽고 헌정회에서 내는 월간지에 우리 정치에 있어서의 바보행진을 곁들여 그 책을 소개한 일이 있다. 마침 출판사 자작나무에서 그 책이 ‘독선과 아집의 역사’란 제목으로 번역돼 나와 반갑다. 터크먼여사는 언론인 역사서술가로 ‘8월의 포성’, ‘스틸웰장군과 중국에 있어서의 미국의 경험’ 등으로 두번씩이나 퓰리처상을 받은 바 있다. 인류의 역사는 숱한 우행(愚行)들로 점철되어 있다. 터크먼여사는 권력들이 어떻게 하여 자기이익에 어긋나는 어리석은 행위들을 저지르게 되는지를 광범하게 다루면서 그 유형을 네가지로 나누고 있다. ①전제 또는 억압 ②지나친 야망 ③무능 또는 타락 ④우행 또는 외고집.역사에 나오는 몇가지 대표적인 경우를 보자. 첫째, 트로이의 지배자들은 그리스인들이 책략을 쓸 것으로 의심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생긴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 둘째, 러시아를 침공하였다가 참패한 선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가 다시 러시아를 침공한 일. 셋째, 일본이 승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941년 진주만을 공격하여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일. 넷째, 장제스총통이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나 경고를 묵살하여 결국 중국을 잃게 된 일. 다섯째, 미국이 월남전의 진흙탕에 빠져든 일. 터크먼여사는 이런 의견을 말한다. “우행은 권력의 아들이다. 권력은 부패한다는 액튼경의 경구가 있지만 권력은 우행도 낳는 것이다. 명령하는 권력은 때로는 사고에서의 착오를 일으킨다. 권력의 행사가 늘어날수록 권력의 책임은 줄어들기가 일쑤인 것이다.” ‘바보행진’을 읽고 당시의 10대 국회때 있었던 박정희정권의 조치들을 우리나라의 예로 들었다. YH근로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에 대한 초강경조치, 김영삼씨의 신민당 당수직 정지와 국회에서의 제명, 신민당 의원들이 의원직 일괄사표를 낸데 대해 선별수리 기도, 부산 마산에서의 민중봉기…. ‘바보행진’의 전형적 경우다. 처음에는 박대통령이, 후반에는 차지철이 시키는대로 모두들 마치 소떼처럼 따라만 갔으니 기막히는 이야기다. 지금 추가하라면…. 전두환정권의 ‘수용소군도적’인 학원안정법 추진과 거기에 추종하는 돌격대라 불리던 강경파들의 바보행진, 노태우정권때 중간평가를 경솔하게 약속하고 국민투표를 하자는 무모한 인사들이 설치는 가운데 질질 끌려다녔던 일을 들 수 있겠다. 김영삼정권에서는 두가지 반노동적인 행태와 요즘의 외환위기를 둘러싼 일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이 명동성당과 조계사에 피신했으면 좀 뜸을 들일 일이지 역사상 처음으로 경찰력을 명동성당에 투입하여 쥐잡듯한 것은 오만이 아니고 무엇인지. 또 노동법 안기부법 개정안을, 특히 DJ(김대중)가 노동법은 1월말까지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습작전으로 날치기 통과시킨 까닭은 무엇인지…. 알다가다 모를 일이다. 우리사회 상층부, 특히 권력은 노동이라는 말만 나오면 마치 그렇게 입력이 되어 있는듯 철권을 휘두르고 싶은 모양이다. 김영삼정권의 몰락을 재촉한데도 이 반노동적 충동이 작용했다 할 것이다. 노동도 견제해야 할 때는 견제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말이다. ‘IMF경제’에서 노동불안은 피할 수 없는데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할 것인지, 또다시 ‘바보행진’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인지 걱정이다. ‘바보행진’은 바보들이 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다는 데에 묘미가 있다. 똑똑하다(Clever)와 현명하다(Wise)는 구별된다. 권력에 지나치게 몰두하거나 빠져버리면 현명함을 잃고 만다. 권력이란 한편 무상한 것이다. 미국의 한 언론인은 권력을 양파에 비유하였다. 그 속에 황홀한 것이 있는 것으로 알고 껍질을 벗기고 벗기며 들어가보면 결국 남는 것이 없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타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타락만이 아니고 눈이 어두워져 현명함을 잃고 겉 똑똑이가 되는 게 아닌가. 최인규가 연상되는 이승만정권의 종말, 차지철이 떠오르는 박정희정권의 비극, 우쭐대던 경제관료가 눈에 선한 김영삼정권의 몰락―모두 그런 ‘바보행진’이 아닌가. 권력자들은 때로는 좀 떨어져서, 또는 관조의 세계에서 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호남대 객원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