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결과는 항상 집이 말해 준다. 대국 내용이 좋아도 집이 부족하면 결국 진다. ‘집’은 냉정한 프로 세계의 기사들에게 생명이자 돈이다. 그래서 집 위주의 실리바둑이 강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리바둑은 밋밋한 산을 오르는 것처럼 맥이 없고 지루하다. 이에 비해 싸움바둑이나 세력바둑은 치열하게 주고받는 데서 오는 재미나 호방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각종 기전에서 실리바둑에 밀리는 듯해 상대적으로 퇴조하는 기색이다. 팬들은 아마추어 바둑처럼 ‘화끈한 것’을 기대하는데 프로의 세계에서 그런 장면은 구경하기가 힘들다. 왜 그럴까.
세력바둑을 즐기는 국내 기사는 김인9단, 강철민7단 정도. 일본에서는 ‘우주류’를 만든 다케미야9단이 독보적인 존재다. 한때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조용한 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중앙에 집을 형성하는 세력바둑은 3선 이하에 집을 짓는 실리바둑에 비해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다. 중앙 변화에 대한 이론도 정립되지 않은 상태.
따라서 수 읽기에 밝고 힘이 좋아야 하며 어느 시점에서 실리로 전환하는 임기응변이 뛰어나야 한다. 실리를 챙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싸움바둑의 대표는 유창혁9단과 서능욱9단. 특히 ‘공격수’라는 별명의 유9단은 한국 바둑계를 이끄는 ‘4인방’이지만 지난해 상당히 부진했다.
싸움바둑의 약점은 기복이 심해 그만큼 위험부담이 높다는 점. 싸움이 먹혀들 때는 무쇠도 녹일 수 있는 힘이 나오지만 일단 ‘이상’이 생기면 약자에게도 허망하게 무릎을 꿇는다. 유창혁9단은 “실리바둑은 집이 조금 부족해도 만회가 가능하지만 싸움바둑은 한번 무너지면 역전이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세력이나 싸움바둑을 두는 사람들 중 좋은 성적을 내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싸움바둑이나 세력바둑이 한물간 게 아니냐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애기가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프로기사들의 시각은 다르다. 고수의 경지에 오르면 굳이 싸움을 하지 않고 ‘안전’과 ‘확실’을 취할 뿐이지 싸움바둑을 못 두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이창호9단의 바둑을 ‘싸움바둑’이라 부르지는 않지만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관련해 이창호9단은 “기풍의 문제이지 전투바둑이나 세력바둑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조훈현9단은 “고수가 되면 어느 바둑이든 다 잘 둔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