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배순훈/통일보다 경제가 급하다

  • 입력 1998년 1월 21일 20시 15분


며칠전 한 선배로부터 ‘우리의 소원은 평화통일’이라고 씌어 있는 연하장을 받았다. 북한에 있는 나의 사촌형은 환갑이 훨씬 지났다. 소식이 두절된지 52년이 지나고 있다. 그는 한국 소식을 접할 때마다 작은 아버지와 사촌동생을 생각하리라. 통일이 되어 만나면 반갑겠지만 어떻게 같이 살 수 있을까. 서로 딸린 식구가 많은데 같이 굶어야 하나, 같이 과소비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나. 형도 부담되고 나도 부담스러울 일이다. 당분간 IMF체제하에 있는 한국은 대북(對北)문제를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만 유지된다면 한국은 IMF빚을 갚기 위해 재정긴축을 하고 기업운영의 합리화에 전념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예산긴축으로 사회보장비용도 축소하는 판에 대북경제원조를 할 재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민간기업의 대북투자는 더욱 어렵다. 예측할 수 없는 사회인데다 경제활동에서 위험부담이 많고 투자의 수익성을 주주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에서 본다면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스스로 국제시장에서 투자를 유치하고 공공기관 차관을 도입해 경제발전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개방에 따르는 체제붕괴 문제만 조금 유예할 수 있다면 말이다. 북한이 한국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중국이나 베트남식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식량증산을 위해 에너지원을 수입해야 하고 농토개량용 기계류를 수입해야 한다. 또 외자를 도입하고 선진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관광수입도 올려야 한다. 외자를 도입해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외자상환을 하는 것도 자력갱생이라고 생각 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북한이 한국을 부담스런 존재로 생각한다면 외국에 대한 개방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휴전선의 평화만 유지된다면 한국은 IMF금융 때문에 외자상환에 바빠서 북한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한국은 적절한 대가를 받고 기술과 경영노하우를 제공하고 투자도 할 용의가 있지만 북한은 정치적 이유로 이를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제가 개방되면 외국기업들은 시장기회와 생산성있는 노동력을 긍정적 요소로 생각할 것이다. 아직은 북한시장이 작지만 북한을 통해 1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는 중국 북부와 러시아 동부의 거대한 지역에 들어갈 수 있다. 북한의 규율적인 노동력은 또 적절한 경영노하우와 결합되면 고도의 기능이 필요하지 않은 생산활동에는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독일식 통일의 패러다임만 벗어나면 남북한이 협력할 방안은 있다고 본다. 정치통일을 전제한 경제협력은 현실적이 될 수 없다. 평화통일은 북한경제가 어느 수준까지 발전한 뒤라야 가능하다. 현실이 그렇더라도 지도자들이 인정하고 합의하면서로 도울 창의적인 방안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대외신인도 추락 요인중에는 남북의 긴장상태도 포함된다. 안정된 남북관계는 우리 기업의 대외신인도를 높여 준다. 협력하는 남북관계는 또 우리의 노사단합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IMF체제를 벗어나는 동안 북한은 북한대로 개방하고 고속 경제발전을 이룬다면 통일문제는 그후에 토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 수혜적인 경협을 지양하고 각자 살길을 찾아나서는 것이 통일을 빨리 이룩하는 지름길이라고 본다. 배순훈 (대우 佛본사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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