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4시. 서울청량리역에서 출발한 밤기차에 몸을 싣고 달려온 태백역. 어스름 새벽길이 온통 눈 세상이다. 5일부터 거의 매일 쏟아진 함박눈. 11년만의 폭설이란다.
미리 약속한 관광버스를 타고 20여분만에 해발 8백20m 높이 태백산 유일사 관리사무소 입구에 닿았다.
태백산을 오르는 길은 당골광장 백단사 유일사쪽 세 곳. 길이 평탄하면서 아기자기한 유일사쪽이 오르기에 편하다.
찌를 듯 매서운 새벽공기를 안고 어둠이 내려앉은 눈덮인 산길을 10분쯤 오르자 정상이 있는 천제단과 유일사 갈림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반갑다.
여기서부터 유일사까지 2.3㎞, 장군봉까지 3.7㎞, 정상인 천제단까지는 4㎞.
완만한 능선을 오르며 힐끔힐끔 새벽 어둠속 눈옷을 입은 나무들에 홀린다. 작은 랜턴 불빛이 훑을 때마다 수줍게 드러나는 눈꽃.
『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 본다』 『해뜨면 정말 예쁘겠다』
졸린 눈으로 구시렁대던 ‘서울 아이들’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온다.
1시간쯤 걸었을까. 새벽 어스름 속에 몸을 드러낸 새하얀 나무들. 저 나무들이 ‘살아 천년 죽어 천년’간다는 주목(朱木)인가.
4천여 늙은 나무들 어깨 위에 소록소록 내려앉은 눈. 신이 만든 거대한 설치미술같다.
드디어 천제단. 돌로 울타리처럼 둥글게 쌓아올린 단에서는 매년 10월3일 천제를 모시는 태백제가 열린다. 북쪽으로 3백m쯤 가면 태백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장군봉이고 오른쪽 능선을 따라가면 문수봉이다.
정상에 오르니 날이 밝는다. 구름바다인가, 안개인가. 앞은 보이지 않고 매서운 눈보라가 옷섶을 파고든다. 하지만 신새벽 신의 나라를 훔쳐본듯 가슴은 연신 두근댄다.
이제 하산길. 5분쯤 내려가니 단종을 모신 단종비각, 건너편에는 아담한 망경사가 보이고 물맛 좋기로 팔도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용정(龍井)이 있다.
컵라면으로 언 몸을 녹이면서 문득 고개를 돌리니 머리에 수건을 둘러쓴 늙은 아낙네가 용정옆 비각앞에서 쉬지 않고 절을 한다.
망경사의 한 스님은 『태백산은 무속신앙인들이 가장 영험한 곳으로 꼽는 신령스런 산』이라고 전한다. 그래서 태백산엔 방방곡곡에서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요즘엔 실직자들이 많이 눈에 띈다. 새해 첫날인 1일에는 천제단에 무려 1만여명이 몰려 새해 소원을 빌었다던가.
하행길은 망경사에서 반재 장군바위쪽으로 이어져 당골광장에서 끝나는데 3시간 가량 걸린다. 숲 사이길은 천연 눈썰매장. 미리 마대자루를 챙겨온 사람들이 ‘엉덩이 눈썰매’를 타고 내려가며 아이들처럼 연신 환호성을 지른다.
백두에서 힘차게 뻗은 산줄기가 금강 설악을 지나 다시 솟구쳐 오르며 빚어낸 백두대간의 등골 ‘크고 밝은 뫼’ 태백산.
태백산은 높되 가파르지 않고 크되 험하지 않다. 남성처럼 웅장하지만 여성처럼 부드럽다. 아이들과 손잡고 오르기에 그만이다. 겨울 태백을 올라보지 않은 사람은 태백을 말하지 말라던가. 태백산의 설경은 4월까지 볼 수 있다.
〈태백〓허문명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