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경보음 어떻게 묵살됐나]쇠귀에 경읽은 8개월

  • 입력 1998년 1월 26일 07시 40분


우리나라의 외환위기는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이 진단한 대로 역시 인재(人災)였다. 경제파탄의 책임규명을 위해 특감을 준비중인 감사원이 25일 대통령직인수위에 제출한 기초조사결과 보고서는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감사원 보고서는 한마디로 “한국은행은 지난해 3월 외환위기징후를 뚜렷이 감지하고 대책까지 건의했으나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은 8개월 가까이 대책을 서류 속에 묻어두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촌각을 다투는 외환시장에서 8개월은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한은은 23차례나 청와대 총리실 재경원에 경고신호를 보냈으나 ‘쇠귀에 경 읽는’ 꼴이었다. 감사원 보고서 중 특히 별첨자료인 ‘한국은행의 재경원 청와대 등에 대한 건의내용’은 경제정책 결정과정의 문제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은은 지난해 3월26일 청와대와 재경원에 낸 ‘최근의 경제상황과 정책대응 방향’보고서에서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긴급차입하거나 시장수급 상황에 따른 환율결정대책 등 비상대책을 강구하라고 건의했다. 한은의 경보(警報)는 8월 들어 부쩍 다급해졌다. 한은은 12일 재경원에 제출한 ‘기아사태 이후 해외차입여건 변화와 대책’보고서에서 한은은 외화유동성의 악화가 4.4분기에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해외차입 독려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조기확대 △금융기관 외화자산매각 촉구 △기아사태 정부대책 조기발표 등을 간곡히 건의했다. 한은은 열흘 뒤인 22일 다시 청와대와 재경원에 ‘외환동향과 대응방향’ 보고서를 띄운다. 외환보유액 감소로 인한 금융기관의 외화유동성 악화를 지적하고 △외국자본 유입 촉진 △금융기관 자구노력 강화 △외환보유액 확충을 건의했다. 이틀 뒤인 24일엔 재경원에 8월 들어 세번째로 ‘금융시장 안정화를 위한 종합대책’보고서를 제출했다.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조기정리 등을 건의했다. 이어 9월12일 재경원에 제출한 ‘외환보유액 운용방안’보고서에선 금융기관의 외화영업자금용 예탁금회수를 건의했다. 9월18일 청와대와 재경원에 제출한 보고서는 환율시장 안정을 위해 현물환 매각초과 규제한도를 완화할 것을 건의했다. 10월 들어 한은은 24일 이후에만 2,3일 간격으로 네 차례나 잇따라 보고서를 내 물이 ‘코 밑’까지 차올랐음을 반영했다. 13일 제출한 ‘10월 외환보유액 운용방안’보고서는 △외환시장 개입규모 최소화 △금융기관의 외화영업자금용 예탁금 회수 △외환보유액 확충 등을 건의하고 있다. 그러나 거듭된 경보가 먹히지 않은 것이 불만스러웠는지 17일 마침내 재경원에 달러당 9백15원선으로 환율지지선의 후퇴를 요청한다. 한은은 24일엔 처음으로 바로 청와대에 ‘아시아지역 주가폭락에 따른 환율정책 대응방안’보고서를 올렸다. 홍콩 등의 주가폭락과 대폭적인 환율절하로 수출경쟁력이 급속히 약화하고 외환시장 개입은 한계가 있으므로 환율을 신축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것. 한은이 재경원과 청와대에 외자유출사태 등 파국적 상황에 대비한 단계별 대책을 담은 ‘최근의 외환사정과 대응방안’ 보고서를 제출한 27일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이 긴급확대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한 날. 따라서 이때까지도 김대통령이 외환위기를 몰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한은은 29일 재경원에 일일 환율변동허용폭(±2.25%)을 신축적으로 운영하자고 두차례 건의한데 이어 31일 재경원에 환율지지선을 다시 달러당 1천원 이내로 후퇴시키자고 건의했다. 한은이 우리의 자력(自力)으로 외환위기를 해결하는 것은 힘들다며 재경원과 청와대에 ‘최후통첩’을 보낸 것은 11월7일. 이날 한은은 △시장원리에 의한 환율운용 △부실금융기관 조기정리 △IMF 등 국제금융기구로부터 긴급자금 조달 등 ‘마지막 카드’를 있는 대로 다 제시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은이 총리실에 비슷한 보고를 한 것은 11월9일 이후부터였다. 〈임채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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