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겨우 두자리 숫자였다. 논 몇 마지기로는 일곱식구 입에 풀칠조차 어려워 아버지는 읍내로 나가 포목장사를 하고 있었다.
명절 때마다 짱짱한 이십리 둑길을 따라 돌아오는 아버지의 자전거 뒤엔 간조기 몇 마리와 고기 한두근, 차례에 쓸 삼색실과와 검정고무신, 인조견 몇 마 따위가 실려 있곤 했다.
▼ 욕망은 욕망을 낳을뿐 ▼
그래도 명절은 늘 풍성했다.
고깃국에 흰 쌀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풍성한데, 과일에 떡에 맛있게 고아 만든 조청까지 얹히고 새 고무신 받아 들면 마음은 벌써 꽉 차 드넓은 들판에 막힘없이 지나오는 설한풍조차 시린 줄 몰랐다. 양철판을 접어 만든 필통에다 새 연필까지 넣어진 선물을 받았던 어느 해 섣달 그믐밤은 흥분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였다.
불과 사십여년 전의 풍경이다.
가난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느끼는 빈곤감의 실체는 꼭 가난 때문에 오는 게 아니다. 예로 웃어른을 숭상하고 덕으로 이웃과 나누던 우리 가난했던 시절의 명절이 오히려 지금보다 풍성하고 따뜻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도 그 증거의 하나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얻고 잃었는가.
성장제일주의의 가파른 관성에 내몰려온 지난 몇십년, 가령 우리는 대형텔레비전과 잘 달리는 자동차와 편리한 휴대전화 따위를 얻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텔레비전 때문에 대화할 채널을 잃었고 자동차 때문에 신선한 대기를 잃었고 휴대전화 때문에 참으로 우리들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참된 휴식을 잃었다. 욕망은 욕망을 낳고 우리는 어느덧 공룡처럼 비대해진 욕망에 떼밀려 허망한 파멸을 향한 삶의 질주속에 으스대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은 분명히 우리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에 꽉 차 있는 불길한 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참되게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메시지가 담긴 실존적 찬스임이 분명하다.
올해 설은 그런 논리로 보면 차라리 축복받은 명절이다. 텔레비전도 끄고 자동차도 버리고 휴대전화도 치우고, 그리고 무엇보다 허깨비같은 욕망의 거품들을 버리고 사랑하는 가족끼리, 미더운 이웃끼리 따뜻이 둘러앉는 설날의 아침상이 보인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풍성했을 때 그 음식에 대한 탐욕때문에 못했던 말들을 이번 설날엔 하게 될 것이다. 허장성세의 선물보따리들을 들고 모인 날 그 선물자랑에 으스대느라 잡지 못했던 손과 손을 국제통화기금(IMF)시대의 이번 설날엔 잡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축복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위기에 강한 민족이다.
위기는 실존을 부르고 실존은 거품 뒤에 있는 우리의 참된 가치를 부르며 참된 영혼의 가치가 확인될 때 우리의 눈은 밝아지고 손발은 부지런히 움직인다.
문제는 방법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의 위기를 오직 경제적 위기만으로 확신하고 아무런 회의없이 뛰자, 다시 뛰자, 혈안이 되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경제제일주의로 내달린다면 우선은 나아질지언정 결국 위기는 오히려 깊어질 것이다.
▼ 겸허하게 새시간을 맞자 ▼
우리가 잃었을지 모르는 가치있는 영혼의 덕목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기반으로 억울함이 없고 억눌림이 없고 또 소외가 없는 방법으로 다시 뛸 때 위기는 오히려 찬스가 될 게 틀림없다.
설날은 다른 말로 ‘신일(愼日)’이다.
새로운 시간을 맞으며 삼가라 한 것은 예(禮)보다도 경(敬)때문이다. 살아있는 것들의 가치에 대한 참된 경(敬)이 뒷받침된다면 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
이번 설날엔 그런 것들을 보자. 돌아가신지 오래된 나의 아버지는 지금도, 저어기 둑길을 따라 희망으로 내게 오신다.
박범신<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