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쾌락 가운데 으뜸은 ‘권력’이라고들 한다. 온갖 술수와 피의 보복을 마다하지 않고 정상을 향해 돌진하는 영웅들의 부나비 같은 속성도 권력의 끈질긴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서가 아닐까.
그러나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날로 심해져가는 세자 양녕의 기행은 마치 ‘권력, 그 따위 것은 형편없는 것 아닌가’하고 비웃기라도 하는 듯하다. 왕관을 쓴 머리, 피를 묻힌 손은 편안하게 잠들지 못한다는 진실을 일찌감치 갈파해버린 탓인가.
세자 양녕 역을 맡은 탤런트 이민우(22)의 연기에는 요즘 한창 물이 올랐다. 점점 극중 비중이 높아가는 세자의 권력에 대한 회의와 인간적인 고뇌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는 평.
지난 일요일 온기도 없이 썰렁한 KBS 본관 스튜디오에서 술과 여자를 끼고 노는 세자 양녕을 연기하던 이민우의 ‘삐딱한’ 표정에는 체념과 조소의 빛이 어렸지만 눈에는 분노의 이글거림이 가득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정말 죽겠다”고 고개를 내두른다.
“양녕은 아주 매력적인 인물이고 통이 큰 사람인데 저는 터무니없이 작은 사람이어서 많이 힘들어요.”
원래 이민우가 맡기로 했던 배역은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찾아 읽으며 세종에 대해 연구하던 도중에 갑자기 양녕으로 바뀌어 버렸다. 태종과 갈등을 빚으며 드라마를 이끌고 갈 양녕의 비중이 높아지는 바람에 촬영시작 2주 전에 바뀌었다는 후문.
촉망받는 배우에다 중앙대 연극학과 수석입학 등 안팎의 부추김에 내심 불안했지만 뭐에 쫓기듯 치달아가던 지난해 봄, 절정에 달했던 자만과 허영 오기가 갑자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모든 방송활동을 중단하고 여덟달 동안 자신만을 들여다보면서 지냈다. 그래서인지 이민우의 태도는 그 나이 또래답지 않게 조용하고 진지하다. 번잡한 것을 싫어해 붙은 별명도 ‘정글북’에 나오는 곰 ‘바루’.
지금까지 이민우가 그려낸 세자 양녕의 행동도 예사롭지 않지만 “아직 시작도 안한 것”이라며 입술을 꽉 다문다.
오는 4월말 결국 폐세자되기까지 감호를 받다가, 야반도주를 하거나 거지차림으로 궐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빈정거리는 등 온갖 기행과 방황을 일삼았던 양녕의 인간적인 고뇌를 실감나게 보여줄 작정이다.
〈김희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