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유승민/정부의 재벌정책 지킬것은 지켜야

  • 입력 1998년 2월 17일 20시 14분


재벌이 과연 개혁의 대상인지 분명치 않지만 재벌개혁의 아이디어는 백출하고 있다. 넘치는 아이디어를 보면 우선 메뉴판이 깔끔하지 못해 국민이나 기업 모두 혼란스러워 한다. 그렇지 않아도 불확실성이 높아 자신감이 없는데 별 소득없이 불안만 가중하는 정책이라면 결코 좋을 리 없다. 위기극복을 위해 재벌의 구조조정이 필요하고 구조조정을 유도하기 위해 정책전환이 필요함을 전제할 때 재벌정책이 지켜야 할 다섯가지 준칙이 있다고 본다. ▼ 아무리 급해 순서 있다 ▼ 첫째, 큰 그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발표된 투명성과 지배구조 차원의 과제는 일단 좋은 출발이다. 하지만 새 정부가 제시해야 할 큰 그림에는 한국자본주의의 비전, 정부―금융―재벌관계의 기본원칙, 부실재벌의 처리방식, 상품시장의 개방, 세습에 대한 징세행정, 주식시장의 내부자거래규제 등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큰 그림을 그리다보면 하찮은 것에 매달리지 않게 되고 작아보였던 것이 오히려 중요함을 알 수도 있다. 둘째, 개혁이 아무리 급해도 순서가 있다. 위기를 초래한 책임의 순서를 따진다면 학계와 언론을 빼고는 정치 정부 금융 재벌 노동의 순이라는 것이 필자의 가설이다. 정치와 정부의 개혁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라도 순서를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 금융개혁만 제대로 이루어져도 재벌의 구조조정은 절반의 성공임을 알아야 한다. 우선과제인 금융개혁에 역량을 결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금융개혁은 더디면서 재벌개혁이 급하다는 식은 잘못이다. 재벌정책 중에도 엄연히 순서는 있다. 투명성이야말로 개혁의 인프라이므로 우선 길부터 닦는 것이 기본이다. 논란의 소지는 있지만 금융개혁과 투명성제고 다음은 채무보증해소가 중요하다. 순서를 거꾸로 할수록 반대세력은 좋아한다. 셋째, 개혁을 주장하려면 개혁이후에 대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회장실을 없애고 총수의 사재를 출연하며 ‘대규모사업교환(빅딜)’이 이루어지면 무엇이 좋아지는지 최소한의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 외자에 의한 적대적 인수합병(M&A)은 미루면서 자사주 취득한도는 왜 3분의 1까지 늘려주는지, 대마불사(大馬不死)가 없다면서 외채에 대한 정부지급보증과 무원칙한 협조융자는 왜 있는지도 설명이 필요한 대목이다. 넷째, 재벌의 장래에 대해 한두가지 모델을 예단하여 이를 기업에 권하거나 강요하는 정책은 금물이다. 특히 기업의 사업구조 지배구조 재무구조에 있어서 국가가 특정모델에 정책을 맞추는 것은 위험한 실험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네 주식회사와 시장을 왜곡하던 비정상요인을 정상으로 환원하는 정책은 강력히 추진하되 기업의 선택을 제약하는 정책은 곤란하다. 이제는 정책만능주의의 환상도 버릴 때다. 정책이란 기껏해야 최소한의 필요를 구비하는 수단일 뿐 재벌정책이 성취할 수 있는 것과 혁신적 대기업의 탄생 사이에는 쉽게 메울 수 없는 틈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틈을 메우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기업의 몫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혁신적 기업가 능력과 기업다운 기업인데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 ▼ 정책만능주의 환상 버릴때 ▼ 다섯째, 이왕 개혁을 할 바에는 추진방식부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새로운 추진방식은 상호존중의 정부와 기업간 관계에 바탕을 둬야 한다. 정부와 기업간 관계를 고치는 것이 시장경제의 발판이 된다. 위법사실이 있다면 법대로 처리하되 그렇지 않다면 국내기업은 외국인투자자와 동일하게 대우해야 한다. 아직도 무언의 압력과 심벌리즘이 통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이것도 개혁대상이다. 총수와 기조실장을 자주 불러모으고 “언제까지 숙제를 해내라”는 식은 옛날 방식이다. 차라리 담합의 온상인 전경련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 다섯가지 준칙으로도 풀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성공한 자본주의경제의 공통점에서 힌트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 유승민<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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