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최고 번화가인 오차드거리에서 차를 타고 바다가 보이는 남쪽끝으로 15분쯤 가다보면 싱가포르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항만이 나타난다. 이곳의 3개 터미널에는 골리앗 크레인 4백30대가 줄지어 서 있고 크레인마다 옆에는 집채만한 컨테이너가 3백여개씩 쌓여 있다. 사람의 모습은 별로 찾아볼 수 없는 이 항구에는 컨테이너를 실은 대형 트럭이 하루 약9천대씩 분주히 드나든다.
그 위를 지나가는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싱가포르 항만은 그 곳의 분주함과는 아랑곳없이 바로옆에 초대형 호화유람선이 한가로이 입항한 국제여객부두, 뒤편에 펼쳐진 녹지공간과 묘한 조화를 이루는 매력적인 관광코스다.
싱가포르의 항구는 규모나 물동량에서 세계 1위를 자랑한다. 전세계 6백여개 항구들을 연결하는 4백개 항로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하루 24시간 내내 3만여개의 컨테이너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97년 한해 싱가포르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아시아 지역 경제위기와 별다른 상관없이 96년도보다 9.1% 증가한 1천4백12만 표준컨테이너 단위(TEU)로 늘었다. 싱가포르는 72년 싱가포르항만청(PSA)을 설립해 항만시설을 전산화해왔다.
항만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69년엔 자유무역지구를 설정하고 종합적인 물류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유통센터를 건립했다. 97년 10월에는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PSA를 민영회사로 탈바꿈시켰다.
싱가포르의 항만에 반입된 물품은 시장으로 이송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통관서류 없이도 보세 창고에 저장할 수 있다. 또 최소한의 통관절차만 거치면 곧바로 재수출이 가능하다. 이곳의 물류능력은 완벽에 가까운 전산화에서 비롯한다.
브라니 탄종파가르 케펠 등 3개 화물 터미널의 면적은 통틀어 여의도 크기만하다. 이 시설들은 많은 물량이 물 흐르듯 들어오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무인으로 컨테이너 트럭의 출입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화물터미널을 모두 합친 정도 넓이의 야적창고와 보세창고까지 모두 컴퓨터로 관리한다.
최단시간내에 짐을 부리고 목적지에 화물을 수송할 목적으로 자체개발한 물류시스템인 ‘터미널 운영시스템(CITOS)’은 세계 어떤 시스템보다도 정확 신속한 물류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중앙 통제 컴퓨터센터는 일단 부두에 배가 들어오면 무선으로 부두를 할당하고 하역작업에 투입할 크레인수와 번호를 지정한다. 선박 입출항에 필요한 문서는 전자교환문서(EDI) 시스템을 통해 모두 전산망으로 처리된다.
컨테이너 선박에는 3∼4대의 크레인이 한꺼번에 붙어 화물을 신속하게 처리한다. 넓은 야적장에서는 화물칸이 2층으로 된 컨테이너 트레일러 한대가 길이 40피트짜리 컨테이너 2개씩을 분주하게 운반하면 대형 트랜스퍼 크레인(T/C)으로 컨테이너를 6∼7단까지 쌓아 놓는다.
배가 줄을 서 기다리거나 화물을 제대로 분류하지 못하는 병목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
부두를 드나드는 컨테이너 차량은 무인 자동식 게이트에 설치된 폐쇄회로TV를 통해 확인절차만 거치고 통과시켜 수송시간을 단축한다. 거대한 화물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시간에 분류가 진행된다. 트럭에 실린 화물은 게이트 자동시스템에 의해 무게 목적지 상품분류를 단 45초만에 끝내고 항만 게이트를 빠져나간다.
입항한 배에 있는 화물이 트럭에 실려 싱가포르의 고객에게 배달되기까지 짧으면 3시간, 길어야 하루가 걸린다. 부산과 인천항에 배가 들어와 목적지까지 도달하는데 일주일씩 걸리는 국내와는 사정이 판이하다.
싱가포르항만에 배가 들어왔다가 물건을 부리고 다시 싣고 나가는 데는 아무리 오래 걸려도 3일만이면 끝난다. 이곳이 바로 싱가포르의 경쟁력을 낳아주는 현장이다.
항만을 빠져나간 트럭은 막힘없이 시내를 질주할 수 있다. 모든 도로가 4차로 이상의 일방통행이라 교통체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모든 도로를 포함한 도시 전체를 지리정보시스템(GIS)으로 전산화해 경쟁력 있는 물류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반도체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수출입하는 현대전자 싱가포르 현지법인(HES) 사무실. 이 회사 조경섭이사는 “싱가포르에 있는 모든 회사들은 서류없이 컴퓨터로 무역거래를 해 화물의 선적과 선박예약을 온라인으로 처리한다”고 말한다.
싱가포르 전역에 퍼져 있는 1천6백여 하역회사는 컴퓨터 네트워크인 ‘포트넷’으로 연결되어 있다. 포트넷은 다시 EDI시스템인 ‘트레이드넷’과 연결돼 항구를 이용하는 회사는 하루 24시간 언제라도 서류를 교환한다. 싱가포르에는 ‘종이 없는 무역시대’가 와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정영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