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여수 오동도 동백꽃]봄시샘 붉디붉은 「인동초」

  • 입력 1998년 2월 19일 08시 32분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것만 오히려 남았읍디다. 그것도 목이 쉬여 남았읍디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전문) 그랬다. 선운사엘 갔더니 그리던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들판 여기저기서 동백꽃을 닮은 들불들만 속절없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남도의 들판은 어느새 봄이 턱밑에 와 있었다. 짙푸른 보리는 꼿꼿하게 몸을 세우고 우우우 하늘을 향해 연방 종주먹질을 해댔다. 바다를 건너온 매콤한 바람속엔 한줄기 상큼한 봄냄새가 어찔어찔 몸과 마음을 취하게 했다. 내친김에 붉은 동백꽃을 찾아 여수 오동도로 가는 길. 순천을 지날때쯤일까. ‘북한도 길만 뚫리면 배달해 드립니다.’ 어느 가구점 앞에 나붙은 플래카드의 글귀가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도대체 IMF가 뭐기에…. 사람들의 가슴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처럼 ‘꽃잎도 빨갛게 멍이 들었다’. 봄바다는 산달의 산모처럼 몸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오동도는 그위에 몸을 풀며 누워 있다. 반가워라. 붉디 붉은 동백꽃 무리들. 유치환 시인의 낮은 목소리가 육자배기 가락이 되어 흐느끼 듯 들린다. ‘목놓아 울던 청춘이 꽃되어 천년 푸른 하늘에 소리없이 피어있는 청춘의 피꽃.’ 바람이 불었다. 오동도의 시누대(갈대처럼 생긴 화살 굵기의 대나무)숲이 부르르 낮게 몸을 떨었다. 그 위로 피처럼 붉은 꽃잎과 샛노란 수술, 짙푸른 잎사귀의 동백꽃들이 언뜻 언뜻 얼굴을 드러낸다. 벌써 땅바닥에 장렬히 몸을 던진 것도 있다. 마치 붉은 피를 울컥 토해 놓은 듯하다. 3만7천여평 섬에 4천여그루의 자생동백이 무리지어 있다.(관리사무소 0662―62―4395). 겨울의 끝. 벌과 나비는 보이지 않는다. 동백꽃은 어떻게 수분을 할까. 깜찍하고 앙증스런 ‘동박새’가 해결사다. 동백꽃의 샛노란 수술을 닮아 깃털도 황금색이다. 동백꽃은 수분을 해주는 동박새가 마음놓고 앉을 수 있도록 잎사귀가 두껍고 크다. 오동도의 동백꽃은 2월말부터 3월 중순까지가 절정. 그 이후부터 4월말까지는 부여 낙화암의 백제 삼천궁녀들 같이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진다. 벚꽃잎이 새털처럼 한잎 한잎 빙그르르 공중제비를 하며 진다면 동백꽃은 가장 아름답게 핀 상태에서 마치 목이 부러지듯 ‘툭’ 송이째 떨어진다. 구차하게 변명도 미련도 남기지 않는다. 극적이다. 그래서 동백꽃은 꽃이 피었을때와 질때 두번 봐야 제격이다. 꽃말도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것. 뒤마의 소설 춘희(椿姬·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도 우리말로 하면 ‘동백아가씨’가 된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장렬히 죽음을 택한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목을 툭 꺾어 땅에 낙화한 붉은 동백꽃과 흡사하다. 한밤중 얼음장이 ‘쨍’하고 갈라지는 소리. 신새벽 뒤뜰 대숲을 훑고 가는 ‘쏴아’하는 맑은 바람소리. ‘딱딱따…’. 적막한 겨울숲 딱따구리가 쪼아대는 참나무의 맑은 울음소리. ‘귀 맑게 트인 날’엔 그 붉디 붉은 동백꽃을 보며 눈도 맑게 씻고 싶다. 그곳이 꼭 오동도가 아니면 어떠랴. 〈여수 오동도〓김화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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