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년 8월8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된 지 5일만인 13일 밤10시20분경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김대중(金大中)씨는 몹시 피로에 지친 모습이었다. 입술 오른쪽은 부르트고 다리에는 타박상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잠시 넋이 나간 듯 경위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살았으면 됐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이렇게 살아온 것은 국내외 동료들의 덕분으로 생각하며 감사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놀란 가족들이 급히 쑤어온 호두죽을 마신 뒤 기자들에게 5일간의 상황을 설명했다.
김씨는 “양일동(梁一東)씨를 만나고 호텔방을 나오는데 체육인같이 생긴 청년 6,7명이 몰려들어 납치했다”며 “내가 반항하니까 무릎뼈와 턱을 치면서 마취제를 묻힌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그순간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머릿속에 빨간불이 홱 지나가는 것 같았다”고 절박했던 심경을 토로했다.
김씨는 또 “자동차에 실려 오사카(大阪)근방까지 온 듯했는데 검문이 시작된 듯 차가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며 “일본경찰이 차가 빠지는 쪽을 조사했더라면 범인은 잡혔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김씨는 특히 “배(용금호)에 태워진 뒤 ‘바다에 던져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범인들의 살의(殺意)를 강조했다. 또 “범인들이 두 팔을 앞으로 묶고 50㎏ 정도의 물체를 달고, 발에도 같은 무게의 물체를 매달아 상하좌우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고 말했다. 범인들이 “그렇게 하면 빠진다” “후까(일어로 상어)…”라는 말도 주고받았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범인들이 부산 상륙후 ‘우리는 구국동맹행동대’라고 신분을 밝혔다”고 전했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