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해인/우리 마음에도 봄볕을 들여놓자

  • 입력 1998년 2월 22일 21시 51분


요즘은 마음이 답답하여 자주 바닷가에 나간다.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앉아있기도 하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조가비를 줍다보면 옆의 사람들과 더러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도 있다. 일이 없는 답답함을 바닷가에 나와 조가비라도 주우며 풀어본다는 이도 있고 국민을 빚쟁이로 만든 나라의 지도자들이 매우 원망스럽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쩌다 다같이 힘든 상황이 되었는데 누굴 자꾸 원망하면 무엇하겠느냐며 그저 그날그날 충실히 살며 인내하는 노력만이 최선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이도 있다. ▼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자 ▼ 간혹 “하루 세끼 밥걱정 안해도 되고 정리해고 당할 염려도 없으니 수녀님들은 정말 편하고 좋으시겠어요”하는 말을 들을라치면 왠지 민망해서 얼굴 붉어진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나는 수도자가 비록 세상에서 물러나 살지만 이는 철없고 안일한 도피가 아니며 세상의 어려움에도 깊이 동참하고 관심을 갖는 노력과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설명해주곤 한다. 절약을 위해 난방시설을 연탄으로 바꾸니 군고구마나 군밤도 먹을 수 있어 좋다는 어느 꽃집 아줌마의 이야기에서, 멋지고 낭만적인 여행은 이제 꿈도 못꾸겠기에 짬짬이 좋은 책이나 실컷 읽으며 황폐했던 내면을 재충전한다는 어느 주부의 다짐에서, 내게 들려주고 싶은 감동적인 동화를 기계로 복사하는 대신 손으로 써서 보낸 어느 교사의 정성에서, 그리고 이면지의 허름한 종이에 글을 써보내며 IMF편지지라고 소개한 어느 소녀의 고운 마음에서 오늘을 열심히 사는 이들의 모습을 느끼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요즘은 어디엘 가든 누구를 만나든 온통 IMF이야기뿐이어서 잠꼬대를 할 지경이다. 언제 우리가 이렇듯 한가지 관심사에 마음을 모은 적이 있었던가. 절박한 현실 때문에라도 우리는 이제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답고 애틋한 추억이 스며있는 금들을 하나라도 더 보태 나라를 살리려는 마음들, 세상이 각박하다지만 아직도 익명으로 이웃을 돕고 있는 따뜻한 마음들이 있는 한 우리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어려움이 없었다면 아직도 많은 이들이 무절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도 정신차리지 못했을 것이고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있었을지 모른다. IMF한파 이후 이혼율이 감소하고 가족들의 유대가 더 깊어지고 귀가길이 빨라졌으며 많은 예식들이 간소화하기 시작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서로가 더 많이 사랑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워야 할 때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나태함으로 늘어진 생활습관을 고치며 이기심과 허영심의 거품을 걷어내고 맑고 깨끗하게 거듭나야 할 때이다. 난방이 안되는 실내에서 떨다보면 한가닥의 햇볕에도 위로를 받고 의지하게 된다. 주위를 덥게 해주는 한줌의 햇볕처럼, 어둠을 밝혀주는 한줄기 햇살처럼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따스하게 녹여주고 밝혀주는 긍정적인 말, 희망의 말, 사랑의 말을 함으로써 IMF한파를 이겨나갔으면 좋겠다. ▼ 서로서로 사랑으로 감싸야 ▼ 남쪽엔 벌써 매화 천리향꽃이 활짝 피었고 진달래도 서서히 꽃문을 열고 있다. 새들의 정다운 아침인사도 우리가 살아야 할 봄을 알린다. 무심히 받아안고 다니던 봄볕이 오늘은 더욱 고마워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자꾸 불안하고 우울해지려는 내 마음에도 밝은 봄볕을 들여놓고 새봄을 살아야겠다고. 희망의 봄을 이웃에게도 전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성서를 펴들었다. 봄햇살 잘 드는 유리창에 붙여두고 오며가며 마음에 새겨둘 두개의 성구를 큰 소리로 외워본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이해인<수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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